1979년 4월 27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반포동의 한 기업체 사장 집에 4인조 강도가 침입했다. 이들은 경비원을 칼로 찌르고 비서를 묶은 뒤 집안을 뒤졌다. 하지만 칼에 찔린 경비원이 집 밖으로 나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달아나다가, 그중 1명이 비명을 듣고 달려나온 주민들에게 붙잡혔다. 이들 일당은 5개월 전에도 서울 휘경동 기업체 사장 집에 선거운동원을 가장하고 침입해 가족을 칼로 위협하고 금반지 등 금품을 털었다.
이 삼류 강도질이 민주화운동으로 둔갑한 것은 27년 후인 2006년이었다. 정부 조직인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이런 행위를 "유신체제에 항거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의 일환"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보통 강도였다면 영원히 남을 전과(前科)가 훈장으로 변한 것은, 이들이 혁명을 강령으로 내걸었던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달아나다가 붙잡힌 강도 이모씨는 훗날 장관 물망에까지 올랐고, 일찍 숨을 거둔 강도 김모씨는 '전사(戰士) 시인'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리며 지금도 일부의 존경을 받고 있다.
사실 강도질은 아무것도 아니다. 1989년 5월 1일 학내 문제로 시작한 농성장에서 화염병을 집어던지다가 경찰관 7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부산 동의대 사건 관련자의 행위도 민주화운동 과정이라고 인정받았다. 2002년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는 "살인에 고의가 없었고 통상의 시위방식에 따라 화염병을 사용한 것이 인정되므로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아리송한 논리로 방화치사상 범죄인들을 민주화운동 기여자로 만들었다.
'민주화'란 이름의 면죄부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결정 이전부터 좌파 스스로가 발급하던 특권적인 전유물이었다. 일반인을 경찰 프락치로 몰아서 10일 동안 감금 폭행한 1984년 서울대 폭행사건은 연루자들의 집요한 주장으로 당국의 조작수사 논란만 부각됐다. 몽둥이 고문, 주전자 물고문같이 수사당국이 밝힌 운동권의 폭력행위는 역사 속에 묻혔다. 당시 고문당한 사람들은 프락치로 몰린 멍에를 안고 낮은 곳에서 살고 있지만, 사건에 연루된 유모씨는 장관, 윤모씨는 국회의원, 이모씨는 변호사 등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이런 경우도 있다. 1984년 서울 강변도로에서 횡단하던 일곱 살 어린이가 자동차에 치여 숨졌다. 사고차량을 운전한 사람은 입만 열면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던 유명 성직자였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사회면 1단 기사로 취급하거나 아예 다루지 않았다. 경찰도 이 성직자를 불구속 입건하는 데 그쳤다. 도로로 뛰어든 어린이를 피하지 못해 일어난 단순사고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효순·미선양 사망사고 당시, 이 성직자가 만든 사제단은 미군이 일부러 일으킨 사고가 아님에도 "살인 미군의 회개를 촉구한다"며 단식기도회를 열었다. 일곱 살 어린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고를 두고 누군가 "살인 성직자" 운운했다면, 그 가혹함을 그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좌파의 세상에는 참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사람은 냉정하게 단죄하지만 자신은 강도질, 치사상(致死傷), 물고문까지 너그럽게 면죄하는 세탁 시스템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광재 전 강원지사에 이어 곽노현 서울시교육감까지 싸고도는 요즘 행동을 보면 조만간 그들의 면죄부 목록에 뇌물까지 추가할 모양이다. 세 치 혀로 세상을 홀리는 그들의 재주가 신기하기도 하고, 때론 부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