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는 모하메드와 오마르라는 이름의 두 청년이 산다.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소셜미디어 덕분이다. 두 청년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에서 매일 짧은 동영상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건물들을 배경으로 자신들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기록해 공유한다. 세계 곳곳에 사는 163만명이 이들의 ‘전쟁터 브이로그(Vlog·자신의 일상생활을 동영상으로 만든 인터넷 게시물)’를 구독한다.
‘전쟁터 브이로그’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단어인가 싶다. 그러나 우리는 ‘끔찍한 혼종’ 같은 이 단어가 실재하는 초연결 시대를 살고 있다. 두 청년뿐만 아니라 많은 이가 전쟁이 불러온 참극을 소셜미디어에 중계한다. 자신들이 처한 극한 상황을 세계에 알리려는 절박한 마음일 것이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도, 1년 전 하마스가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고 납치했을 때도 그랬다. 그들이 올린 사진과 영상 덕에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
소셜미디어 게시물이 단순한 정보 전달 이상의 파급력을 끼친 경우도 적지 않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그는 전쟁 초기부터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알리며 서방에 지원을 호소했다. 미국의 망명 제안을 거절한 그가 수도 키이우의 황량한 거리에서 “조국에 남겠다”고 한 영상은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했다. 외신들은 그를 “위대한 지도자”라 치켜세웠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잠깐 관심을 모으는 것 외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수백만 조회 수나 ‘좋아요’는 비극을 끝내는 데 어떤 역할도 못 하고 있다. 되레 사람들은 전쟁의 이미지에 너무 익숙해졌다. 무감해졌다. 젤렌스키를 향해선 “지겹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미국 작가 수전 손택은 “사람의 마음을 휘저어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라고 했다. 이미지를 보고 느끼는 충격은 잠깐이다. 손가락 한번 쓸어 올리면 타인의 고통은 휘발된다. 초연결 시대의 암(暗),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듯하지만 사실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의 한계일까, 아니면 인간성의 한계일까. 어쩌면 두 가지가 상호 악영향을 끼치며 분열과 단절을 초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셜미디어가 열어젖힌 ‘나르시시즘의 시대’에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광고하는 수단으로까지 삼고 있지 않은가.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에서 홍수를 이루는 ‘팔레스타인에 자유를’ ‘우크라이나와 연대’ 같은 해시태그 상당수는 유행에 편승한 자기과시나 연민에 불과하다.
마음속 불편함을 손쉽게 덜어내고 싶을 뿐, 비극의 원인이나 해결 방법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고통을 겪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건, 나 자신은 안전하다는 위안의 손쉬운 알리바이일지도 모른다.
3차 세계대전이란 단어가 미국 대통령 후보 입에서 나오는 시대다. 전쟁이 세계를 집어삼킨다면, 서로의 고통을 소비하는 데만 익숙한 인류에겐 어떤 비극이 벌어질까. 인류애나 연대를 허상(虛想)으로 여겼던 오늘을 후회하게 되진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