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낙서
민노총의 위선(인터넷 펌)
박감독
2022. 7. 3. 18:10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들은 종신고용제의 보호를 받았다. 한 번 회사에 들어가면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고용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한 정부는 IMF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정리해고'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케이스가 현대자동차였다.
당연히 노동조합이 중심이 되어 파업이 일어났다.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없었던 민노총 차원의 연대 집회가 연일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그해 겨울이었던 1997년 말, 당시 KBS '일요스페셜' 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이 될 순간을 기록하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독립영화 판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세상을 기록하고 있던 나로서는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8월로 예고되어 있던 '정리해고' 결행까지는 8개월이나 남은 시점, 노동조합은 긴장하면서 파업을 준비했다. 당시로서는 현대자동차 사측이나 노동조합이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심정이었다. 그래서 서로 조심하면서 충돌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세계 자동차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경제 불황으로 내수가 얼어붙자 현대자동차의 공장 가동률은 예년 대비 44%까지 떨어졌다. 매일 1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이 없는 상태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시절이었다. 정리해고는 불가피해 보였다.
문제는 그 숫자였다. 노사가 해고자 숫자를 놓고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결국 4,380명을 해고 해야 하는 상황에 노사가 합의를 했다. 사측에서는 곧바로 해고자 명단 작성에 돌입했고, 노동자들은 그 해고자 명단을 '노란 봉투'라고 불렀다.
8월이 되면서 드디어 사측에서 각 공장 라인의 나이 든 반장들을 동원해서 '노란 봉투'를 해고자 집에 직접 전달해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회사에서 해고된 자와 해고를 통보해야 하는 사측 사이에 팽팽한 긴장과 대립이 벌어졌다.
언론에서는 대한민국 최초로 시도되는 정리해고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이라이트는 '노란 봉투'가 해고자에게 전달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걸 취재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노란 봉투'를 들고 오는 반장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당연히 그들을 취재하는 카메라 기자들이 봉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똥바가지를 카메라를 향해서 퍼붓는 노동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취재 자체가 불가능한 폭력적이고 살벌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8개월 전부터 울산에 내려와 노동자들과 친분(?)을 쌓고 있던 나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다. 이미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드디어 내가 아는 한 노동자의 집으로 '노란 봉투'가 전달될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곧바로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미 몇 달 동안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다 보니 거부감 없이 카메라를 든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솔직히 이전까지 나에게 노동자의 이미지란 8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니면서 형성된 야학과 전태일이 전부였다. 가난하고 힘 없는 노동자, 그에 맞서는 욕심 많은 자본가 집단.
주소를 받고 해고자의 집을 찾았다. 놀랍게도 그의 집은 현대가 건설한 30평 대 아파트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3년 차 노동자, 비록 그는 해고 대상자였지만, 서울에서 방 한 칸짜리 월세에 살며 독립영화판에서 일하던 나로서는 모든 게 충격이었다.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보다 못할 것 없는 삶이었다. 게다가 현대자동차 직원 할인가로 산 아반테까지, 뭐 하나 남 부러울 게 없는 생활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정말 그들의 안락한 삶은 부러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다행히 당시 그의 집에서 촬영했던 '노란 봉투'를 주고 받는 현장은 특종이 됐다. 그런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특종'을 잡았다는 기쁨보다, 그의 아파트를 보고 받은 충격이 더 강하게 남았다. '도대체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가난한 독립영화판을 나와서 방송 제작에 몰두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무튼 그렇게 이후에도 나는 울산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같은 해 겨울, 한 노동단체로부터 연락이 왔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결성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다시 찾은 울산에서 나는 그렇게 현대차 노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노동자들과 마주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가로막는 현대차 노동조합은 각성하라!"
겉으로는 노동자 단결을 외치고 있었지만, 실제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조합을 만드는 것을 결사 반대했던 집단은 아이러니하게도 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파업 현장에선 늘 '흩어지면 죽는다'고 외치고 있지만, 정작 절대 빈곤과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보호받아야 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민노총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노란 봉투'를 받았던 현대홈타운 아파트에서의 충격 다음으로 강하게 다가왔다. 노동자의 적은 바로 노동자였다. 정작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있는 자들은 민노총에 가입한 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며칠 전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외친 민노총, 5만 명의 도심 집회를 보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문재인 좌파 정부 때 조용하던 민노총이 슬슬 기지개를 펴는 모양이다. 1998년 IMF 때도 '생존권'의 위협을 느낀 게 어디 민노총 노동자들 뿐이었을까? 2022년 지금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저들은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은 귀족노조들의 천국이다. 그리고 그 모든 혜택을 정규직 노조를 중심으로 한 민노총이 받고 있다.
이들에겐 다른 약이 필요없다. 엄격한 법 집행, 그리고 법을 위반한 자들에게 적법하게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유치하게 공권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다. 돈에 약한 그들에게는 벌금보다 두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ㅡ이형선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