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낙서

타인의 명예를 함부로 짓밟은 댓가

박감독 2024. 3. 2. 08:46
모두 다 끝났다.
취소된 퇴국식과 송별회 대신
우체국 택배 박스에 잘 포장 된 감사패가 도착했고
나는 남은 명함을 세로로 잘게 잘라 쓰레기통에 버렸다.
3월 1일,
이제 정말로 소속이 사라졌고
처음으로 계획 없이 쉬고 있는 중이다.
사태가 장기화 되면 그 다음엔
사직자 복직 - 재입사 - 강제취업 명령을 내리려나.
나는 뭘 하던 사람으로 기억되거나 혹은 기록될까.
-
나는 사실 모아둔 게 많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 했겠지만
오직 알라딘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Cave of Wonders 처럼
혼자만 아는 동굴에 나는 이미 많은 걸 모아두었다.
내 동료들도 그랬다.
그들의 동굴에는 내 것보다 더 귀한 금은보화가 많았다.
그들 중 몇몇은 아주 높은 벼랑으로 올라가
아무나 가지지 못할 진귀한 보물들을 캐 왔기에
종종 부러웠고 때로 시샘이 나기도 했다.
그러니 그 힘으로 지금껏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 온 동굴지기들은
아직 동굴에 쌓은 것이 많지 않다.
사실 예전에는 열심히 수풀을 헤치기만 하면
수 많은 보물들이 우수수 떨어졌는데
지금은 보물 자체가 희귀한 세상이 되었기도 하다.
심지어 누군가 촘촘히 덫까지 놓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아무튼 잘려 나가는 것은 우리의 발목이니
보물의 가치를 경험한 적 없는 새 동굴지기들은
애써 보물 캐러 다니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동굴지기들은 꾸준히 우리를 찾아 왔다.
동굴지기 따위, 외롭고 지저분한 일인 것을 알아도
여전히 그 빛에 반해 찾아오는 어린 동굴지기들이 있었다.
전설같은 보석의 광채를 꿈꾸는 자들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줄 알고
굳이 애써야 가질 수 있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수풀 속을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헤치며 보물을 찾았다.
-
그런데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 숲에
더럽고 냄새나는 오물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새 동굴지기들은 이제 숲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아무리 꿈 꾸던 보물이 저 안에 있다 해도
오물과 가시덤불과
닿기만 해도 상처입는 독초가 무성한 숲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내키지 않는 걸음일 것이다.
금은보화의 환희를 경험한 오래 된 동굴지기들은
어떤 악취가 아무리 독하게 풍긴다 해도
여전히 저 안에 귀한 것들이 있음을 알지만
제 손으로 만져본 적 없고
제 눈으로 보지 못한 새 동굴지기들은
선뜻 믿어지지도 들어가고 싶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물을 버리고 간다.
함부로 뿌린 가시덤불과 독초의 씨앗은
그냥 두어도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멀리 멀리 자라 나간다.
타인들이 평생에 걸쳐 애 쓰고 쌓아온 일들에 대하여
멸시와 조롱, 폄하와 저주 가득한 잔인한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고
무수한 이들이 그에 엄지척으로 공감한다.
자유민주국가의 국민으로부터 기본권을 박탈하는 일에
우레같이 쏟아지는 박수를 보며
앞으로 나는 저 숲에서 어떤 귀한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
잠시 쉬어가는 물가에 앉아 하루 종일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모아둔 보물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정말 보물일까? 너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구나,
속삭이는 마녀의 꿈도 매일 꾼다.
너무 많은 말을 들었고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다.
동굴 속 보물의 가치를 아무도 몰라 준다면
동굴지기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러니 젊은 동굴지기들은 숲을 떠나고
늙은 동굴지기들은 동굴 지키기를 포기한다.
이제 새 동굴지기들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 곳은 이미 숲이 아니라
낙숫물 흘러 넘치는 시궁창이 되었으므로.
숲과 낯선 사막 사이 어디쯤 앉아 있는 나는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
내 동굴 속의 보물들은
아이들의 생명과 웃음,
가족의 행복과 안녕,
그리고 당신이 있어 주어 고맙다는
말 한마디와 다정한 미소였습니다.
가치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내 앞에 온 환자에게 일부러 나쁜 결정을 한 적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매일 수 많은 전화와 메시지가 쏟아지는데
나의 동료들은 어디서 외워 오기라도 한 듯
똑같은 말을 합니다.
그냥 배운 대로 치료하고 일 하며 살았을 뿐인데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 했길래
온 세상이 이렇게까지 우리를 미워하냐고.

의사들이 잃은 것은 돈이 아니라 명예입니다.

의사들이 빼앗긴 것은 돈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투쟁이 아니라 포기이며
전공의들은 환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오랜 꿈을 접은 것입니다.
여기서 끝날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타인의 삶과 자유에 대해 함부로 발 걸고 비웃지 마세요.

다음은 당신일지 모릅니다.

- 소아 청소년과 교수님이 사직서를 내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