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용 기록집

피해자 코스프레

박감독 2023. 8. 23. 09:25

위안부로 십수년째 시위하는 대한민국.
공금횡령하고도 버젓이  국회의원 행세하는것이
통용되는 이해못할 대한민국.
<위안부> 마패로 모든것이 용서되는
약자 코스프레 전염병세상.

해방후 이땅에서 강간 폭행당한
수많은 일본여인들의 한은 모르쇠로 일관.
베트남전쟁당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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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글 퍼놓습니다.


일본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이 흘렀다. 지진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다쳤지만 희생자 중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학살된 조선인들도(피해자 중엔 중국인, 대만인도 적잖았다) 있었다.

반복되선 안 될 슬픈 역사다. 그래서 우리는 추모한다. 가해자가 일본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다는 건 스스로가 가해자가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도 있다. 인종혐오 범죄는 현재진행형의 이슈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시기 조선땅에서 일어난 화교배척사건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에서의 화교들을 향한 대규모 공격은 1927년과 1931년 두 차례 일어난다. 둘 다 만주에서의 권익을 두고 벌어진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갈등이 계기였다. 이 지역에서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박해했다는 소식(만보산 사건도 그 중 하나다)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평소 화교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조선인들이 이들을 공격한 게 발단이었다.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당시 조선에서도 화교들은 사업을 확장하며 로컬 지역민들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이들을 향한 공격에는 조직적인 린치도 적잖았다. 많게는 1000명 이상이 무리를 지어 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조선총독부와 주조선중화민국총영사관의 자료에 따르면 공식 집계된 사망자만 144명이었다(특히 평양에서 많이 죽었다). 중상자도 131명이었다. 인명피해 못지 않게 재산피해도 컸다. 테러의 대상은 주로 화상(華商)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적잖은 영업장들이 파괴되고 불탔다. ‘호떡집에 불 난듯’이란 표현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 사건과 관련해 학계마저도 일제를 탓하는 논조가 지배적이더라.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해 식민지 통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것이란 소위 ‘일제의 사주설’이다. 심지어는 중국인들을 향한 공격이 벌어질 때 일부러 치안 활동을 하지 않아 ‘테러를 부추겼다’라는 표현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경찰의 대응은 지역에 따라 달랐는데 무장 경찰을 적극적으로 투입해 화교를 보호한 곳들도 적잖다). 인종혐오 범죄에 대한 반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반일감정과 반중감정이 적절히 뒤섞여 시야를 가린 탓일까.

일본땅에서 살아가는 재일교포(在日)들이야 약소국이자 피식민 국가 출신으로서 완벽한(?) 피해자의 서사가 있지만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은 그런 것도 없다. 중국은 강대국이고, 공산당은 노골적으로 횡포를 부리니 혐중정서는 암묵적으로 합리화가 된다. 서글픈 구조다.

얼마 전 신림동에서 일어난 무차별 칼부림 사건이 생각난다.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와 관련해 연합뉴스가 ‘신림 흉기난동 피의자는 33세 조선’이라는 속보를 냈을 때 “역시 흉악범죄는 조선족”이라며 혀를 차던 사람들. 중국인 혐오는 그렇게 어느새 우리 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렸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과 화교배척사건은 100년 전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지만 오늘날 재일교포들과 재한중국인들의 처지는 많이 다른 듯 보인다. 혹시 모르겠다. 아이브의 장원영이 화교인권 운동에 나선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ㅡ페북글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