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절을
실제로 살았었던
조선인 청년이
그 시절을 기억하는 얼굴.
금아(琴兒)선생의 저 표정이
일제시절을 바라보는
조선인의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전쟁에서 졌다는것...
"전쟁이 없었더라면
아담하고 예쁜 집에서
아사코(あさこ)와 같이 살 수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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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 수필 '인연'(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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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생으로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시절에 태어났었던 금아 피천득 선생이 일본으로 가 동경에서 미우라 선생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때 그의 나이 17세 였고 미우라 선생의 딸 아사코는 초등학교 1학년 8세 정도 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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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아사코는 자기 신발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연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하였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코에게 안델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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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4년이 지나고 1940년 쯤 서른살 금아 선생이 다시 동경을 찾았을때 스물 한살 아사코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목련 꽃 같은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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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令孃] 윗사람의 딸을 높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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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코와 금아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고 했다
그때 아사코가 했던 말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선생은 그말을 평생 잊지 못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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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이후 반도에서는 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1941년부터 1953년 까지 13년 그 길고긴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이듬해 1954년 금아 선생은 처음 미국에 가던 길에 도쿄에 들러 마지막으로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간다. 분명히 아사코를 다시보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그때 선생의 나이는 45세 아사코는 3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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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 들러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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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장교와 결혼하여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얼굴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선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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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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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기억을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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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50년 쯤 지나 2002년 KBS 일본 특파원이
구해온 아사코의 십대시절의 사진을 보여드리자
아흔을 훌쩍 넘긴 금아 선생이
어린시절 아사코의 사진을 보며
소년처럼 설레여 하며
아이처럼 미소짓던 그 얼굴을 기억한다.
방송이 끝나고 선생은 KBS제작진에게
아사코의 그 사진을 받을 수 없겠냐고
물어보셨다고 한다.
일생을 못잊고 그리워 하던 얼굴.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아담하고 예쁜 집에서
아사코와 같이 살 수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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