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묘(동관왕묘)
명나라 13대 왕 만력제가 짓고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 동대문 근처 동묘이다.
만력제 주익균은1572년 1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48년간 명나라를 통치한 최장수 왕이다.
1592년 임진왜란시 조선을 대규모 군사로 도왔다.
그 때문에 명나라 재정이 파탄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만력제는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싸운 명나라 장수들은 이후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 땅에 관왕묘를 지으라 요청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선조 32년(1599) 공사를 시작하여 선조 34년(1601)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 명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사를 짓는 중에 신하와 유생들, 그리고 언론삼사는 백성들이 고생한다고 관왕묘를 짓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공사는 강행되었고, 건축은 무사히 끝났지만 선조와 신하들은 동관왕묘를 홀대했다. 선조의 왕위를 이은 그 아들 광해군은 선왕과 달리 동관왕묘의 수리를 명하고 제례를 지내도록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동관왕묘에 관한 기록은 실록에 나오지 않다가 숙종 때에 가서야 나온다. 숙종은 관우의 충절로 시도 지었고, 동관왕묘에 참배도 하였다.
숙종 17년(1691) 2월 17일에는 무안왕묘(동관왕묘)를 보수하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왕인 영조도 동관왕묘에 자주 참배를 했고, 영조 15년(1739) 6월 9일에 동관왕묘를 중수하도록 하였다. 정조도 관왕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정조는 동관왕묘에 비석을 세우가 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제국 때에는 고종이 관왕묘를 적극 지원하고 관왕을 관제(關帝)로 높여 관제묘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에는 수많은 관왕묘들이 훼손, 철거되었다.
명나라로 부터 어려운 시기에 많은 도움을 받아서인지 병자호란 때 청나라 용골대의 침략을 당한 중에도 인조가 명을 향해 예를 갖추어 춤을 춘 것이 이해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목멱산 신당이나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 잔재라서 없애버렸지만 관운장 사당을 모신 동묘는 오늘날도 조용히 존속하고 있다.
글은 나무위키에서 일부 펐고 사진은 관운장사당이다.
보관용 기록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