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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야기

양형자의원의 내력

양형자의원이 반도체 특위위원장으로 발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무위키의 그녀 이력을 보았습니다.
광주여상 출신이 삼성전자 상무가 되고 반도체 특위위원장이 되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정치적 논란이 있는 인물이긴 합니다만 열정이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했군요. 아울러 국힘의 변신 노력도 높이 삽니다. 왠만한 신문기사보다 몰입감이 있습니다.
<양형자 나무위키 삼성전자 시절>
광주여상을 졸업하고 1985년 11월 삼성전자 기흥연구소에 입사해서 반도체 메모리설계실 연구보조원으로 일했다. 그 당시 그녀는 주산, 부기 (장부기입), 타자 밖에 할 줄 몰랐다. 그렇다 보니 커피 타고 책상 닦고 복사하기, 반복적으로 반도체 회로를 보고 그대로 따라 그리기 정도의 잡일을 했다. 이런 업무들은 성장가능성이 없다. 호칭도 '미스 양'이었다.
어느 날 당시 부서장이었던 임형규 책임연구원[7]이 악필로 글을 휘갈겨놓은 뒤 '야, 누가 이것 좀 정리해 봐라!' 하고 말하고 책상에 놓고 나갔다. 그녀에게 시킨 일은 아니었지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글을 읽어보니 전문용어 투성이었다. 선배들에게 물어서 간신히 글을 해독하고 서식에 맞게 정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임형규 책임이 돌아와서 보고 깜짝 놀라면서 누가 했는지 묻고는, "미스 양! 물건이네! 잘 했어!" 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것이 입사 후 처음으로 이름을 불리며 받은 칭찬이자 최고 실력자에게 받은 칭찬이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성실성을 인정받는 것과 기술을 배우는 것은 별개였는데, 당시 그녀는 연구원이 되고 싶었지만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 그녀가 복사해서 연구원들의 책상 위에 올려놓던 서류는 주로 일본어로 된 반도체 기술 논문들이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게 1983년이라 일본보다 기술이 뒤쳐졌다. 그래서 박사들도 일본어 논문을 읽어야만 했다. 복사 심부름을 하면서 일어에 능통한 연구원 수가 의외로 적다는 걸 알게 된 후, 사내 강의를 통해 일본어를 공부하려고 했다. 고등학교 때 주 1시간씩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지만 그 정도로는 논문을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삼성전자 인사부서에서는 '고졸이라서' 사원 대상 일본어 강의의 수강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세 번째 신청하자 '전례가 없어서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후에 몇 번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신청하자 결국 강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듣는 사람들이 다 대졸 출신인데다, 일본어 강사마저 "네가 뭘 할 수 있겠냐"며 무시를 당했지만, 불과 3개월 만에 일본어 자격증을 제일 먼저 땄다고 한다. 주말에도 기숙사에서 계속 일본어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다 배운 다음 복사한 자료 밑에 0.5㎜짜리 볼펜으로 깨알 같이 해석을 달아 나눠줬다. 그날 처음으로 '미스 양'이 아닌 '양향자 씨'라고 불렸다. 그때부터 그녀는 업무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연구원들이 일본어 서적을 들고 번역해달라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 연구보조원에게는 승진한다는 희망이 없었다. 임형규 책임이 기껏 칭찬한다고 꺼낸 말이 "열심히 해라, 꾸준히 실력 쌓으면 부장도 될 수 있을 거야"였다. 당시에는 연구보조원 출신이 부장을 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순수하게 칭찬한다고 한 말이었다. 양향자는 속으로 '사장도 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좋게좋게 넘어갔다.
당시 연구보조원에게는 책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적당히 회의실이나 탕비실 티테이블에서 대기했다. 그녀는 임형규 책임에게 건의해서 책상을 받아냈다.
일본어 번역을 할 수 있게 되자 임형규 책임이 팀 회의에 끼워주기 시작했다. "앞으로 미스 양도 회의에 들어와라, 잘 몰라도 그냥 들어봐."하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지만 어쨌든 참석했다. 팀 회의 참석과 일본어 서적 번역을 통해 기술력을 쌓아 자신도 반도체 설계 업무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사내에서 흔치 않았던 일본어 자격증을 가진 여성 사원이었던 터라 이와 관련해 일화가 하나 있다. 1988년 당시 반도체 산업 선진국이었던 일본에서 대단히 중요한 반도체 권위자인 하마다 시게타카 박사가 내한했는데, 회사에서 양향자에게 일주일 동안 하마다 박사의 통역과 가이드를 맡겼다고 한다.
당시 22세밖에 안 됐던 양향자의 일본어 실력은 통역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할 수 있겠냐'는 회사의 제안에 양향자는 기꺼이 업무를 맡겠다고 수락했다. 본인 스스로도 "사실 제가 그분들을 모시고 다녔어야 했는데, 그분들이 나를 모시고 다닌 거 같다(...)"고 자기 디스를 할 만큼 뛰어난 통역 가이드는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하마다 박사는 양향자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다. 하마다 박사는 귀국길에 오를 때 공항에서 양향자에게 "너무 따뜻한 일주일이었다. 내 집으로 초대를 하고 싶다"는 인사를 건넸고 실제로 귀국한 지 2주도 안 돼 양향자를 초청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천 장의 편지와 연하장, 카드를 주고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양향자가 반도체 산업계를 떠나 정계 입문한 뒤 처음으로 도전한 선거였던 2016년 4.13 총선에서 낙선한 뒤 4월 20일 인사차 하마다 박사의 자택을 방문하였는데, 하마다 박사가 양향자에게 “실망하지 마라”고 위로한 뒤 “정치권에 가면 앞으로 중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텐데, 이것을 사용하라”고 격려하며 고급 커피 그릇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 커피 그릇 세트는 하마다 박사가 약 30년 전 우리나라로 왔을 때, 삼성그룹의 창업주였던 이병철 회장이 하마다 박사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고 한다. * 유튜브 인터뷰, 해당 에피소드는 49분 22초부터

1990년 삼성전자 직원과 결혼을 하였는데, 당시 고졸 여사원은 일이 힘들거나 결혼하면 퇴사하는 게 보통이었다. 당시 연구보조원 여상 고졸 입사 동기가 30명이었는데, 1991년 즈음에는 그녀 외에는 다 퇴사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일을 계속 하면서 1991년 딸을 낳았는데, 출산 전날까지는 일을 계속 해야 했으며 일이 고된 나머지, 부산의 시댁에 아기를 맡기고 오는 무궁화호 열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맡길 곳을 찾지 못 해 입구 보안시설의 외부인 면회실에 아이를 맡겨 놓고 출근한 적도 있다고도 한다.
이런 복사 및 번역업무지원 일이 회사에 알려졌다. 당시 임원 비서 1명이 그만뒀는데 회사에서 후임자를 찾다가 상고 출신에 일본어 자격증이 있다고 그녀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임형규 책임이 '니는 저 자리에 안 맞다'고 한마디로 못 하게 했다. 기술 연구원으로 커야 할 사람이 비서로 가면 커리어패스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임형규 책임은 그녀를 개발팀으로 끌어당겨줬다.
E-2 (전문대졸 사원 직급) 승진은 쉽게 성공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뒤 E-3 (대졸 사원 직급) 승진심사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필기 시험은 붙었지만 면접 시험에서 이렇다 할 실수나 잘못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배를 마셨다고 한다. 이 당시 직장 문화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여자가 아이를 낳았으면 '당연히' 퇴사하고 집안 일에 힘써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상식처럼 굳어져 내려오던 때라, 그녀는 면접관들이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승진 시험에서 누락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면접관에게 할 얘기를 테이프에다 녹음해서 몇 번씩 녹음을 반복하며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승진심사에서 면접관한테 직접 얘기하는 패기를 보여줬다.
두 번째 필기 시험에 붙고 다음 면접 시험에서 면접관들에게 대놓고 "전 오늘 여러분께 면접을 보러 온 게 아닙니다. 만약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닌다고 해서 이렇게 승진 시험에서 누락시키는 회사라면 제가 회사를 떠나겠습니다. 전 이런 회사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쏘아붙인 뒤 그냥 면접장을 나와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승진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8] 이후 엘리베이터에서 그때 면접관으로 앉아 있었던 임원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임원들은 양향자에게 "무서운 여자야!"라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인사말을 건넸다고 한다. 유튜브 인터뷰, 해당 에피소드는 4분부터 시작
1989년에서 1991년까지 임형규 책임연구원과 23명의 부서원들은 CCD 반도체 소자 국산화를 위해 3년간의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1991년 당시 그 부서의 말단 연구원 5명 중에 그녀의 이름도 연구원으로 올라 있다.
입사 후 계속 연구보조원으로 지내다가 1993년 1월 SRAM 설계팀 책임연구원으로 승진했다.
1991년 사내 대학 (삼성전자 기술대학 반도체공학과)[9]에 원서를 냈으나 반려되었다. 고졸 여사원에게 학업 지원을 한 전례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 해 또 원서를 내자 '여상 출신이 공학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면서 반려했다. 3번째 원서를 내자 '심사대상이 아니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규상 7년 이상 근속이면 누구나 참여가능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근거로 교육부서에 가서 따졌다. 교육부서 고위급이 '심정은 알겠지만 전례가 없어 곤란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전례가 없으면 자신이 선례를 만들겠다'고 우겨서 입학했다.
들어갈 때는 꼴찌로 입학했다. 여성 고졸 연구원 보조는 그녀 1명뿐이었다고 한다. 공업수학, 유기화학, 고체물리학 등을 가르쳤지만 그녀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회사 멘토 선배[10] 아랫집으로 아예 거처를 옮겨 틈틈이 과외를 받았다. 그 결과 199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2007년에는 DRAM설계팀 수석연구원으로 승진하였으며 2008년 2월 성균관대학교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11] 2011년 플래시설계팀 수석연구원 및 부장을 거쳐 2014년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 상무로 승진하였다.당시 동아일보 기사
1995년부터 2016년까지 약 42건의 특허를 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