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빠진 美·러 평화협상... 월남 패망 전 미국 생각과 판박이?
1973년 파리 협정때 "남베트남에 있는 北월맹군 활동 보장"
트럼프 "우크라 땅, 러시아가 싸워 얻어...되돌리기 힘들어"
1938년 뮌헨 협정 때 英 "먼 나라 다툼, 우리가 왜 싸우나"
트럼프는 "양쪽이 바다인 우리는 유럽보다 안전하다"
그러나 러시아에 국토의 20%를 빼앗긴 우크라이나는 물론, 전쟁 발발 이후 미국(1142억 유로)보다 더 많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한 유럽국가들(1323억 유로)는 초대받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도 처음엔 언급하지 않다가, 며칠 뒤에야 우크라이나도 적절한 때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ㆍ러가 합의의 기본판(板)을 깔아놓은 뒤, 러시아를 협박할 핵(核)은 고사하고 자체 방어능력도 없는 우크라이나에게 이를 일방적으로 강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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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 미국에선 미ㆍ러 간 우크라이나 평화협상은 1973년 베트남 전쟁 종결을 위해 맺었던 파리 평화협정과, 1938년 히틀러의 침략 야욕을 막기 위한 유화(宥和)협정이었던 뮌헨 협정을 맺기까지 정책결정가들이 보였던 사고(思考)와 매우 유사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닉슨 “평화협정 이후에,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집어 삼키면?”
베트남 전쟁을 끝내는 파리 협상을 진행하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최대 고민은 미국이 발을 뺀 뒤에, 북베트남(공산 정권)의 월맹군이 합의를 어기고 베트남을 결국 함락시키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1972년 8월3일, 파리 협상의 미 대표인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닉슨에게 “성사 가능성이 50대50”이라고 보고했다. 닉슨이 물었다. “북베트남이 시간을 벌었다가, 나중에 베트남을 집어 삼키면?”
키신저의 답은 이랬다. “지금부터 1,2년 뒤에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먹어 삼켜도, 그 때쯤이면 이는 남베트남 정권의 무능이 빚은 결과로 비칠 것이므로, 우리 외교 정책은 건실한 것입니다.” 키신저는 “따라서 우리는 1,2년 버틸 수 있는 정책을 고안해야 합니다. 그 뒤엔 베트남은 (미국인 관심에서) ‘뒷전’이 될 것입니다. 지금이 10월이니, 1974년쯤 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고 했다.
닉슨은 그래도 양심의 가책이 조금 들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이 그렇게 오래 싸우고 죽어갔는데…아, 하나님, 나도 모르겠네.”
두 사람의 대화는 이후 공개됐고, 월스트리트저널의 칼럼니스트 맥 건은 “결국 두 사람이 진짜 원했던 것은 미군 철수와 남베트남 패망 사이의 ‘괜찮은 시간적 간격’이었다”고 비판했다.
결국 1973년 1월의 파리평화협정은 응우옌 반 티에우 남베트남 대통령의 강력한 반발에도, 휴전선 남쪽 아래에서 북베트남군 병력이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우크라이나의 실지(失地)를 놓고 “러시아가 많은 병사를 잃으며 싸워 얻은 땅”이라며 러시아의 지속적인 점령을 인정하는 듯한 트럼프의 발언을 연상케 한다.
이 협정으로, 미측 협상 대표인 키신저와 북베트남 대표 레득토는 1973년 10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됐다. 레득토는 수상을 거부했고,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 전차들이 사이공으로 진격해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을 지도에서 지웠다. 다음날 키신저는 노벨상을 반환하려 했지만, 노벨 위원회는 이를 거부했다.
물론 우크라이나 전장에는 미군이 없고, 애초 푸틴이 10일이면 끝날 것이라는 ‘특수작전’은 곧 3년이 될 정도로 우크라이나군은 끈질기게 싸웠다.
그러나 파리 협상이 티에우 남베트남 대통령의 뜻과 달리 진행된 것처럼, 리야드 평화 협상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나 그 측근의 참여 없이 시작한다.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은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평화를 업적으로 남기려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조언은 푸틴이 가장 반대하지만 ‘우크라이나의 평화 정착에는 가장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라며 “만약 평화 협정이 재앙으로 끝난다면, 트럼프가 고스란히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체임벌린 “알지도 못하는 먼 나라 다툼에, 참호 파는 것 끔찍”
1938년 9월 독일의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이 지역에 사는 독일 민족을 보호한다는 구실이었다.
자국 영토의 3분의1을 요구 받은 체코슬로바키아는 강력히 반발했지만,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에 나선 영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는 독일과 이 할양에 동의하는 뮌헨 협정(9월 30일)을 맺었다.
체코는 “독일은 하루면 우리나라를 반토막낼 수 있다”고 했지만,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한 보좌관은 “(당신네) 지리적 현실은 우리 책임이 아니고, 나머지 영토는 안전하고 침략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체임벌린 총리가 뮌헨 협정에 서명하기 수시간 전, 한 참모가 “히틀러는 독일민족의 생활공간(Lebensraum) 확장을 위해 지속적인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체임벌린은 “정치적 현실감각을 좀 키워야겠군”이라고 대꾸했다. 민주적인 국가의 대중이라도 달갑지 않은 현실을 떠안기를 싫어하는 ‘현실’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는 뮌헨협정 서명 3일 전인 1938년 9월27일 라디오 연설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우리가 전혀 모르는 민족들 간에 벌이는 다툼 때문에, 우리가 참호를 파고 방독면을 써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라고 했다. 그가 당시 나치의 계획을 알았듯이, 미국은 사실 푸틴이 어떤 자이고 러시아가 뭘 하려고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트럼프 “우리는 양쪽에 바다가 있고, 유럽은 없는데”
2월3일, 트럼프는 유럽의 안전을 위해서는 유럽이 훨씬 많은 국방비를 지불해야 한다며, “이봐요, 우리는 양쪽에 대양이 있소. 그들은 없고. (러시아 위협이) 우리보다는 그들에게 더 중요한 거죠”라고 말했다. 2022년 2월23일 러시아의 침공 전날 J D 밴스 당시 상원의원은 팟캐스트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별로 관심 없다”고 말했다.
체임벌린은 뮌헨협정 체결 뒤에, 다우닝 10번지 총리 관저 밖에서 “이게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 평화는 336일 갔다. 그리고 1939년 9월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은 2077일간 전쟁을 겪어야 했다.
트럼프는 지난 13일 푸틴과 통화한 사실과 곧 두 나라의 평화 협상단이 만날 계획임을 알리며 “나는 평화를 위해 이 자리에 있을 뿐이며, 수백만 명[트럼프의 과장]이 살해되는 것을 막고 싶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