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18.10.19 17:21 수정2018.10.20 11:04 지면A20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23) 조선 사회구성의 정체
'선비의 나라'는 주관적 해석
근세문명 핵심은 독립적 개인
조선은 노비가 인구 30~40%
19세기까지 차별적 신분제 지속
유례없던 조선 노예제
조선 납공노비는 가족·토지 소유
미국 남부 노예제 사회와 달라
농노는 주인의 땅에 묶여있지만
조선 농민은 이동의 제약 없어
'지배와 보호' 원리 없었던 조선
납공노비도 농노 아닌 노예
조세·공물 낸다고 公民 아냐
임진왜란 등 외부 충격에 취약
(23) 조선 사회구성의 정체
'선비의 나라'는 주관적 해석
근세문명 핵심은 독립적 개인
조선은 노비가 인구 30~40%
19세기까지 차별적 신분제 지속
유례없던 조선 노예제
조선 납공노비는 가족·토지 소유
미국 남부 노예제 사회와 달라
농노는 주인의 땅에 묶여있지만
조선 농민은 이동의 제약 없어
'지배와 보호' 원리 없었던 조선
납공노비도 농노 아닌 노예
조세·공물 낸다고 公民 아냐
임진왜란 등 외부 충격에 취약
15~19세기 조선왕조가 세계사적으로 어떤 사회구성인가에 관한 역사가들의 생각은 공개적인 논의나 논쟁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지각색이다. 그런 가운데 주류라 할 만한 흐름이 있다면 근세사회설이다.
근세(近世)는 중세와 근대 사이에 놓인 과도기다. 인간의 사회적 지위를 태생적으로 차별하는 신분제가 해체되고, 인본주의 문화가 고양되고, 사회는 합리적인 관료제로 통합되고, 상업경제가 활발히 전개되는 사회가 근세다. 일부 중국사 연구자는 이런 조건을 갖췄다고 해서 송(宋) 이후의 중국을 근세로 규정한다. 한국사 연구자도 마찬가지 시각에서 조선시대를 근세로 규정하는데,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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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근세사회설은 그에 합당한 경험적 근거가 결여돼 있다. 지금까지의 연재를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들어 양반·노비를 축으로 한 신분질서가 전 사회적 범위로 확산되고 강화됐다. 사회의 공동체적 편성이 해체되고 모든 인간이 왕조의 개별 인신 지배체제에 포섭됐다. 그 결과 노비가 전 인구의 30~40%까지 확장됐다. 노비제는 18세기 들어 쇠퇴하지만, 인간의 사회적 지위를 양반과 상민으로 차별하는 신분제는 19세기까지 쇠하지 않았다.
서유럽 근세 문명의 핵심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의 발견이다. 송 이후의 중국사에서도 도덕 실천의 주체로서 또는 욕망의 주체로서 개인은 긍정됐다. 조선 성리학에서 그런 조짐은 19세기 중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일기 전까지 관찰되지 않는다. 근세사회설은 20세기 후반 한국의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주관적 역사 해석에 가깝다.
그에 의하면 조선의 노비는 생사여탈이 주인에게 잡힌 재물로서의 노예였다. 노비는 주인의 소작농으로 토지를 경작하고 지대를 바쳤다. 그런 노예적 생산양식이 조선 경제에서 지배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팔레는 이 같은 이유를 들어 조선을 그리스·로마나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와 같은 노예제사회의 대열에 포함했다.
팔레의 학설 역시 경험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15~17세기 노비제 전성기에 주인과 소작 관계를 맺은 노비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입역노비는 주인에게 부림을 받으며 주인의 농사를 지었는데, 이를 가작(家作)이라 했다. 가작이 조선 경제에서 지배적인 생산양식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주인에게 정기적으로 신공을 바치는 납공노비는 주인의 토지와 무관한 곳에서 자신의 가족과 토지를 보유했다. 납공노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지는 조선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 역시 주인의 재물이었으나 자신의 토지를 소유했으니 그 성질이 모호하고 복잡하다.
농노제사회설
조선시대를 농노제사회로 간주하는 학설은 김석형 전 북한 사회과학원 원장이 1950년대 정립한 것이다. 그는 노비의 본질을 주인의 땅을 소작하는 농노로 봤다. 팔레가 주인의 재물이라는 노비의 법적 지위를 강조했다면, 김석형은 소경영의 주체라는 노비의 존재 형태를 강조했다. 반면 왕조에 조세와 공물을 납부하는 양인 농민을 두고 김석형은 농노보다는 예속이 덜한 예농이라 했다. 그는 조선사회를 양반·노비의 농노제와 왕조·양인의 예농제가 상호 보완하는 농노제사회로 규정했다.
농노제사회설의 가장 큰 문제는 노비든 양인 농민이든 토지에 긴박(緊縛·꽉 졸라 얽어맴)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는 백성을 토지에 긴박하지 않았다.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 농민은 지역 간 이동에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구체적 사례에 의하면 하층 농민은 평균 1.5세대 만에 살던 면을 떠나 다른 면으로 이동했다. 직접생산자 농민이나 수공업자를 특정 촌락이나 직업에 긴박하는 것이 농노제사회다. 그러면 농민과 수공업자의 공동체가 결성되고 사회생활의 자치가 이뤄진다. 농노제사회에서는 불공평하나마 ‘동의와 계약’의 원리가 작동하며, 세월의 경과와 함께 근대를 예비하는 농민적 권리가 성숙한다. 조선시대는 그런 사회 편성의 원리나 실태와 무관했다.
제후의 나라
조선왕조의 세계사적 성격을 모색할 때 조선왕조가 명·청 제국의 제후국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종래의 학설은 이 점에서 큰 한계를 안았다. 제17회 연재에서 소개한 대로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은 그의 역사적 정통성을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구했다. 조선왕조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포기하고, 국가체제를 제후의 가례로 정비했다. 동시에 양반과 서민의 가례를 국례의 일환으로 승격했다. 그 결과 조선의 국가체제는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예(禮)의 국제질서로 편성됐다.
고대 중국의 《예기(禮記)》는 천하의 질서를 천자(天子)-제후(諸侯)-대부(大夫)-사(士)-서(庶)의 위계로 설명했다. 조선왕조는 그 고대의 천하관을 수용해 국가체제의 원리로 삼았다. 송 이후 중국은 천자를 정점으로 한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시대를 열었지만, 조선은 천자를 정점으로 한 국제적 위계의 신분사회를 개척했다. 천자가 맨 꼭대기에 앉은 연고로 그 질서는 일종의 자연법으로서 부동의 안정성을 구가했다. 조선 5세기 동안 이 질서에 도전한 어떤 정치가나 사상가도 등장하지 않았다.
국제적이었으므로 이 질서는 자기 완결적이지 않았다. 조정의 관료는 제후인 조선 왕의 신하이지만 대부로서 천자의 신하이기도 했다. 이 질서는 도덕적이니만큼 퍽이나 일방적이었다. 조선왕조는 그의 백성에게 한 조각의 토지도 나눠주지 않은 채 조세와 공물과 군역을 수취했다. 양반 주인은 베푸는 것 하나 없이 도처의 납공노비로부터 신공을 거둬들였다.
‘동의와 계약’ 또는 ‘지배와 보호’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았기에 그 국가체제는 외부의 충격에 무척이나 취약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의 그 같은 특질을 유감없이 폭로했다. 왜군의 한성 침입이 임박하자 임금이 평양으로 피란했다. 그러자 왕실을 호위하는 금위군이 가장 먼저 흩어졌다. 조정의 백관도 분산했다. 한성의 노비들은 임금이 떠난 궁궐을 불태웠다.
새롭게 정의될 노예제사회
제19회 연재에서 소개한 대로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는 이원적이었다. 토지로부터 조세와 공물을 수취하면서 토지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인신으로부터 각종 역을 수취하면서 당자의 토지가 얼마인지 묻지 않았다. 몰인신의 토지 지배요, 몰토지의 인신 지배였다. 이 때문에 조세와 공물을 낸다고 해서 왕조에 속한 공민(公民)이 아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납공노비를 반공반사(半公半私)의 농노로 간주한 나의 오랜 주장이 설 자리를 잃었다. 납공노비 역시 노예였다고 봄이 옳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원시사회 이후 노예제와 농노제가 순서대로 펼쳐졌다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 노예제나 농노제로 일관한 사회가 더욱 많으며 농노제에서 노예제로 이행한 나라도 있었다. 새로운 지평의 역사학에서 ‘동의와 계약’ 또는 ‘지배와 보호’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은 사회는 광의의 노예제사회로 정의될 수 있다. 조선왕조는 그렇게 새롭게 정의될 노예제사회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