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종교적) 무의식을 통한 각자의 경험적, 영적 체험의 광기
무국적인 도파민 중독 컨텐츠의 파급력
고등학생 때부터 소련에 관심이 많았다. 중2병, 고2병이 맞고, 고등학교 때 보수적인 기숙사 사감한테 하도 괴롭힘을 당해서 왼쪽 세계에 자연스럽게 이끌렸던 것도 있다. 당대 인터넷 공간을 점유하고 있던 70-80년대생들 영향도 초등학생 때부터 받아서. 그러다가 굳이 러시아 혁명에 관심이 생긴 건 열심히 하던 2차세계대전 게임 영향도 크고 MB 시기를 풍미한 진보 교양서의 영향도 컸다. 그리고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기껏해야 교사 하나한테 반항도 제대로 못 하는 나에게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로 접한 러시아 혁명사는 그야말로 웅장했다. 모든 박해 받는 자의 신세계를 건설하겠다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면서 권력을 접수하다니!
와, 이 엄청난 혁명으로 건국된 나라가 대체 어떤 역사를 거쳤고, 또 어쩌다가 망했을까. 책을 더 찾아보았다. 그 다음에 읽은 게 아마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인데, 이 책은 정반대로 완전히 으스스했다. 700만명이 굶어죽은 농업집단화, 60만명이 총살당하고 200만명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대숙청. 대체 이건 뭐지? 이 위대한 혁명이 어떻게 이런 공포통치로 흘러가지?
그런데 다음 이야기는 더 경악스러웠다. 그 스탈린의 무시무시한 통치에 신음하던 이들이 조국이 침략받았다는 이유로 총을 잡고 자살 돌격을 결행하고 3천만명 가까운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국가를 지켰다. 이런 이야기야말로 학교 축구 시간에 눈치보며 깍두기나 하고 원수지간인 사감 눈치 보면서 만화나 읽어야 했던 나에게는 그 어떤 대하 판타지 소설보다 엄청난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게 실제 있었던 일이라니?
혁명의 환희와 무시무시한 공포 통치, 그걸 딛고 이겨낸 나라가 침체를 거듭하다 못해 끝내 멸망하고 10년의 대환란이 펼쳐지는 허무함까지... 딱 20살 교양용 소련사의 줄기를 짚은 나로서는 이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정말 혼란스러웠다. 여기서 빠지기 제일 좋은 함정이 ‘착레나스’론이다. 그러니까 레닌은 착했고 혁명은 선했는데, 나쁜 권력 악마 스탈린이 나와서 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부를 더 해보니까 이것도 아니었다.
그냥 레닌이랑 스탈린이랑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고, 인간 해방을 하겠다고 봉기한 그 사람들이 공포 통치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었고, 심지어 그 모든 고난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당연히게 받아들이고.. 왜 이것을 받아들였냐? 스탈린 통치가 자신에게 아무리 고난이어도 세계 혁명의 생존과 인간 해방의 기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내해야 했으니까.
스탈린 말기에 당에 의해 끌려가 고문을 받던 어떤 정치범이 스탈린이 죽었다니까 자신도 모르게 쿵 하고 가슴이 주저앉으며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이상했던 감정도 아직도 기억한다.
인간이 이럴 수 있나? 이게 맞나? 결국 20대 내내 가졌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 개인의 안온함과 발전을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자유주의적 주체 이외의 다른 인간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2016년 박근혜 탄핵이 될 무렵에 완연한 자유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할 때는 소련을 잠시 배교도 했었다. 어차피 세상은, 트럼프가 뭐 잠깐 되기는 했어도,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문화적 진보주의를 결합한 방향으로 흘러갈텐데,
소련의 실험은 그냥 흥미로웠던 역사의 질곡이자 실패한 실험 아닌가. 기나긴 인간의 역사는 그런 광란의 역사였지만,
우리는 18세기 계몽주의의 무궁한 발전으로부터 그 광란으로부터 해방되고 있다. 우리 모두 전문가를 신뢰하는 합리적 인간이 되도록 하자.
물론 이후 트럼프 시대의 전개와 한국 정치의 향방과 여러가지 계기가 이 배교를 멈추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는데... 다른 영역에서 중요했던 지적 경험은 이슬람주의였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랍의 봄을 맞았고, 대학교 1학년 때 게지 공원에서 최초의 반에르도안 시위를 보았다. 이때는 그러니까 이슬람주의와 민주주의는 양립 가능한 것인가, 아닌가, 이슬람주의는 중세적 광신의 귀환인가, 또 다른 근대 정치 운동인가라는 논쟁이 중동 지역학에서 굉장히 중요했던 시기였다. 이때 이슬람에 관심이 생겨서 전공을 서아시아로 잡은 덕택에 당대의 뉴스들을 늘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었고, 복학 하고는 몇 년의 시간 차를 두고 이 무렵의 기억들을 새삼 다시 공부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슬람주의를 공부하면서 최종적으로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은 이성 너머의 존재라는 것이었다.
종교적 세계관은 인간이 농경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잠시 ‘채택’된 것 아니었나? 어떻게 이슬람이라는 종교, 그것도 근대적 발전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종교를 위해서 저런 거대한 정치 운동이 발생하고, 심지어 성공까지 할 수 있는가? 세속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것을 굉장한 퇴행으로 묘사했지만 나는 어쩐지 거기에는 동감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일지라도 많은 사람이 참여하면 거기에는 분명 맥락이 있고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 자신들의 삶에서 충족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슬람주의를 지지하는 것 아니었을까. 이란 이슬람 혁명이 과연 자유롭게
발전하던 팔레비 왕조를 호메이니 같은 광신자들이 뒤엎고 전체주의 체제를 건설하기만 한 혁명인가? 에르도안 체제는
광기 어린 포퓰리스트들을 동원해서 제국의 미몽에 국가를 취하게 한 잘못된 체제인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 운동에 투신할 수 있지?
뭐 그런, 비자유주의적인 인간 주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한 번 인지하니 역사 공부가 훨씬 더 재밌어졌다. 결국에는 나와는 무척이나 다른 시공간에서 자라난 이들을, 바라보며, 이들이야말로 내가 할 수 없는 일, 하지 않을 일을 감히 할 수 있는 이들이구나 감탄했다. 좋은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소련 체제는 앞서 말했듯이 700만명을 굶어죽이고 60만명을 처형했다. 농업집단화와 대숙청 과정에 있었던 인간성이 말살되는 끔찍한 글들도 적지 않게 읽었다.
이슬람주의는 또 어떤가? 소련과 미국이라는 양대 초강대국을 아프가니스탄의 동굴에 숨어서 무찌른 저 위대한 전사들은 부르카를 쓰지 않은 여성들을 돌을 던져 죽이는 잔학무도한 인간들이다. 이란 혁명 정권이 혁명의 적을 절멸시키겠다고
에빈 감옥을 건설하고 포크레인에 사람을 메달아 교수형을 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교수형을 시키거나 총을 쏘는 건 시켜도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과 마그니토고르스크 건설의 환희에도 동참하지 못하고, 자신의 개인적 삶과 아무 상관없는 이스라엘을 없애고 팔레스타인을 해방하겠다고 시리아에서 비밀작전을 하는 혁명수비대가 되지도 못한다.
영적 체험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영적 체험은 딱 이 의미다. 개인을 뛰어넘어서, 이 세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영생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찾은 것 같은 자아멸각의 경험이 영적 체험이다.
뭔가 엄청난 일을 가능하게 하는데, 그 방향은 초유의 광기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거대한 위업의 달성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마약 먹고 춤추는 것도 영적 체험이다. 히틀러의 연설에 광기 어린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뉘른베르크의 군중도, 아무 의미 없는 자살 작전을 수행하러 미국 항공모함에 자폭하러 뛰어드는 가미가제 조종사도 영적 체험이 없이 순전히 강압 만으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군부 독재의 군홧발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에 뛰쳐나오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고, 세워진 지 2년 밖에 안 되는 나라를 공산군으로부터 지키겠다고 총을 드는 학도병의 의지가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아의 유지와 안온함, 발전의 관점에서 보면 미친 짓이다. 중요한 것은 미친 짓은 무언가 사람의 정신을 뒤흔든다는 것이다. 나는 윤석열이 모택동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몰린 이가 대중의 광기를 깨웠다. 그런데 숱한 사람을 린치하고 거대한 폭력을 자아낸 홍위병은 영적 체험을 한 것이 아닌가?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이 반제국주의와 패권주의, 수정주의에 맞서는 세계 혁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었고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은 홍위병은 널리고 널렸다.
당연히 남태령의 순간도 영적 체험이다. 당연히 나는 그 현장을 떨떠름하게 생각한다. 그 구성원들의 의제에 대부분 반대한다. 하지만 그들이 거기서 영적 체험을 했고, 그 참여자들이 그 순간의 기억으로 앞으로를 살아갈 것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실제로 아이돌 콘서트에 몇 번 참여해본 사람인데, 거기서 몰아적 체험과 유사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 도구를 들고 추운 겨울날에 연대를 하러 어깨를 마주했다면 이미 그 자체로 무언가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정신이 작동한 것이다. 그리고 기다림의 끝에, 우직한 트랙터가 도로 저편에서 기계의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것을 직접 보고, 수많은 사람이 거기서 환호를 내지르고 경찰이 물러가는 것을 본다면... 전봉준의 미완의 숙제를 자신들이 해냈다고 자평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충효 얘기도 한 번 해보도록 하자.
이 단어 너무 ‘구시대적이지 않냐’ 아니면 ‘폭도들에게 참 좋은 말 갖다붙인다’라는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이 단어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관제 이데올로기로서 동원한 것이다. 그 정권과 세계관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거부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충효도 그냥 문화적인 무의식이라고 생각하면 영적 체험만큼이나 그냥 가치 중립적인 말이 된다.
요컨대 우리는 시부모를 모시라고 자신의 아내에게 ‘대리 효도’를 시키는 아들의 삐뚤어진 효심에 대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알고 있다. 혼미한 주군을 지키겠다는 작은 충성으로 국가와 공동체를 향한 큰 충성을 저버리는 일들은 어쩌면 지금도 숱한 조직에서 현재 진행형일 것이다. 그러나 왜 그런 삐뚤어진 일들이, 이해 안 되는 일들이 가능한가? 역시 이것은 이성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심층적인 문화의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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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전래동화부터 국가 교육 체계와 언어 곳곳에 숨어 있는, 1천년 이상 축적된 유교적 무의식 말이다. 당연히 기독교 세계에는 기독교의 무의식이 있고, 이슬람 세계에는 이슬람의 무의식이 있다.
레닌의 시체가 방부처리된 것은 성인의 시체는 썩지 않는다는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러시아 혁명은 정교회와 러시아 농촌 사회의 평등주의라는 문화적 무의식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죄를 정화하고 고난을 극복하여 신세계를 만든다’는 문화적 무의식이 잔혹한 공포 통치도 가능하게 했다. 이란에서 왜 성직자들의 통치가 가능할까? 신의 진리는 시아파 법학자들이 해석해낼 수 있다는 사파비 제국 이래로 500년 간 지속된 문화적 무의식 덕분에 가능하다.
내가 문화적 무의식으로서 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러시아 혁명과 소련, 이슬람 세계의 역사와 비슷한 뿌리가 우리 사회에는 혹은 동아시아에는 무엇이 있는가 궁금해서였다. 우리 아버지로부터 들어온 집성촌 이야기도 중요했다. 이점에서 나는 박훈 교수님의 메이지 유신에 관한 책과 김상준 교수님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를 매우 재밌게 읽었다. 단순한 서구화라고 생각했던 메이지 유신이나 역시 서구식 민주주의를 추구한 운동이라고 알고 있었던 4.19 운동 등이 사대부 정체성, 공론과 학당 정치, 천명에 관한 정의 관념에 따라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니, 러시아 혁명이나 이슬람주의를 문화적 코드를 통해 이해할 때 느꼈던 청량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우리는 유교의 민족이다. 무당을 괴력난신이라고 그렇게 혐오하면서도 모두가 무당을 무의식 속에서 찾는 것은 또 “유생과 무당”의 정신일 것이다.
여기서 또 내 의문은 다른 쪽으로 향했는데, 그렇다면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산업화 세대는 어떤 문화적 무의식이 있었으며, 그들의 영원을 향한 감각을 자극하는 코드는 무엇일까에 관한 문제였다. 여기서도 어떤 유교적 코드들은 매우 쉽게 발견될 수 있었다.우리는 좌와 우 이전에 모두 한국인이다.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위해 투신했고 그 결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 포항제철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연설을 듣고, 그리고 포항제철을 성공시킨 그 건설대원들은 영적인 체험을 했을 것이다. 지하방에서 담배를 태우며 일본산 맑스주의 금서를 읽으며 학생운동가들이 느낀 그 지적인 짜릿함도 나는 영적 체험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모두 국가 공동체에 충의를 지켜야겠다는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우파로서 전자를 후자보다 훨씬 위대한 업적이라 생각한다. 사실 후자는 잘못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느낀 각성과 전율의 순간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역시 모든 영적 체험에는 광기의 각성도 존재한다. 살인적인 구타 속에서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내는 순간을 보았을 때 느끼는 오싹함. 너무나 명백히 보이는 북한의 실상에 눈을 감을 때 느껴지는 의아함. 이는 모든 위대한 위업의 동전의 양면이다.
특히 개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체로 이는 삶의 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주의를 새로운 신조로 삼게 된 X세대가 유독 이에 대한 반감이 큰 것도 이해가 안 가는 바가 아니다. 나도 그들이 학교부터 군대를 거쳐 직장까지 각종 조직에서 항거해준 덕분에 상대적으로 훨씬 편안히 의무를 마치고 개인의 안락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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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는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때 2시간 반만에 계엄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피를 흘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만, 내 우경화에 실망하고 나를 떠난 분과 마지막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지금 우파 포퓰리즘과 유라시아 권위주의거 얼마나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지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했다. “하지만 내가 10년 간 보아 온 임명묵은 그렇지 않다. 당신은 분명 이 탈냉전 자유주의의 안락함을 그 누구보다 바라마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계엄 때 그 말이 참으로 맞음을 직감했다. 그러니 그 참사를 피해가게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이 사안이 적법한 제도적 절차에 따라서 공정하게 처분될 것을 기원할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적어도 이 많은 사람들이... 계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단까지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게 된 이 상황이 안타깝다.
비겁한 안락함 속에 늘 관찰자 입장만 취하려고 하는 나로서는 그 모든 감동의 순간에 공감하고 싶다. 우리는 남의 나라 역사를 볼 때는 그 낯선 타국의 이야기에는 쉽게 공감을 해준다. 러시아 혁명에서 인간 해방을 외친 그 어떤 바실리가 20년 뒤에는 혁명 동지를 밀고하여 굴라그에 보내고, 독일로부터 맞서 싸우기 위해 지뢰밭을 향해 돌격하는 것은 이해해준다. 그 바실리의 후손이 공산주의가 지루하다고 한가롭게 미국 락밴드나 쫓아다니다가 결국 소련을 망하게 해 국가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낸 것도 이해해준다. 그러니 나는 우리 사회 안에서도 그런 이해를 갖추고 싶다. 물론 이해 위에서 각자의 옳음과 그름을 위해서 언젠가는 핏대를 세우며 싸워야할 것이다. 현재 나는 민주당 세계관, 정책, 그들의 역사관 등 모든 것에 도저히 동의해줄 수 없다. 여기에 맞서 싸우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뭐 어차피 그건 반대편에서 87년 이후로도 계속 해온 일이었으니 이쪽도 그래야만 한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결코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남태령에서 응원봉과 트랙터가 만났을 때 그들에게 밀어닥쳤을 감동을 이해한다. 그리고 나는 역시 그렇게까지 동의하지는 않지만, 광화문에서 청년과 노인이 만났을 때 나타난 감동을 이해한다. 농민에 대한 우리의 사랑, 노인을 모시고자 하는 마음, 공동체를 위해 추위를 견디겠다는 의지는 수백년 한반도에서 유교 촌락을 이루며 살아온 우리의 정신적 유전자나 다름없다. 내가 존경하는 우파의 몇몇 어른들은 이 유교적 뿌리를 어떻게 절연하실지 고민하지만 나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이 유교와 무속, 선비와 무당의 정신과 끝끝내 동거하며 살아가고 후손들에게 우리의 밈을 물려줄 것이다. 그 밈이 우리가 느끼는 감동과 광기의 원천이자 영적 체험의 근간이다.
물론 그 감동이 과연 우리 사회에 좋을지 안 좋을지는 각자 평가의 몫이다. 둘 다 난동이라고 치부하면서 그 시간에 통장 잔고 늘릴 생각이나 하라고 혀를 찰 수도 있다. 쟤들은 대체 양곡법이 뭔지나 알고 저기에 나가서 응원봉 흔드는 건가? 라고 물으며 경찰을 폭행하고 법원에 난입하는 이들도 있다. 반대로 어떻게 계엄을 지지하지?라고 물으며 사이버불링에 딱히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안의 윤리적 무게는 당연히 다르다. 같을 수 없다. 그러나 그 판단 기준에 따라서 우리 사회는 반으로 갈라졌다. 3:2? 7:3? 구체적 비율은 중요하지 않다. 영호남은 뭐 얼마나 인구 다수여가지고 그렇게 대한민국의 정서를 지배했나? ‘공동체 구성원으로 무시할 수 없는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충분히 많은 사람이 이렇게 싸우게 된 것이 슬프다. 그러니 이 계엄이 일어난 사실 자체가 원망스럽다. 내가 집회를 다녀오고 법원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황당함 다음에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보수 시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 박근혜 탄핵 시위에 나갔던 내 자신이 후회스럽다. 어느해의 10월 26일에 김재규 묘를 찾아 박정희 사망을 조롱하는 포스팅을 올린 것을 보고 나에게 따끔하게 혼을 낸 이들이 고맙고, 그것을 품어준 이들이 고맙다.
어느날 오송역에서 서울역을 올라가고자 승강장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탄 적이 있다. 명절날 선물세트를 힘겹게 쥐고 있는 할머니가 에스컬레이터에서 갑작스럽게 중심을 잃자, 뒤에 있던 나와 앞에 있던 어떤 40대 여성분이 그 할머니를 모두 잡아주고, 연신 “괜찮으세요?”를 외쳤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아이고”로 안타까워했다. 뭐 그분의 실제 정치 성향은 우리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을 정치와 선거의 숫자로만 보면 나는 이미 극우가 된 2030남성이고, 그분은 악명높은 82년생 김지영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마주했을 때 우리는 같이 이 나라를 위해 애쓴 노인을 부축해준 가족이었다.
나는 그 가족들이 어떤 누구라도 악마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인류 가족의 일원으로서 수많은 즐거움을 안겨준 소련이나 중국이나 이란이, 혹은 일본이나 미국이 악마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살아 숨쉬는 인간이고, 모든 인간은 하나보다 크다.
임**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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