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포로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군의 포로가 된 미군 중 사망자는 1% 미만이었다. 일본군 포로가 된 미군의 사망률은 37%가 넘었다. 항복을 금기시하는 일본군의 전진훈(戰陣訓, 陸訓 제1호)이 포로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적나라했다. 1941년 12월 이후 미국은 일본에게 ‘제네바포로협약’을 위반하면 책임을 묻겠다고 여러 번 경고했다. 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 제10조도 포로 학대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규정했다. 필리핀을 회복하고 포로수용소의 참상을 확인한 맥아더는 격노했다. 그의 격노에 포로수용소장 홍사익 장군이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1945년 8월 8일 대일선전 포고를 한 소련은 만주에서 관동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우격다짐으로 시베리아 강제노역에 내몰았다. 역사의 틈바구니에 낀 관동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은 서글픈 사연을 가슴에 묻었다. 소련은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자국 병사까지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스탈린은 그런 인물이었다.
6·25 전쟁의 공산군 포로는 줄잡아 17만, 북한군이 15만, 중공군이 2만 정도였다. 포로송환 협상에서, 북한과 중공은 ‘적어도 3개월간 중립국 관리 아래 포로들의 진심을 확인할 기회’가 필요하다고 우겼다. ‘반공포로’ 존재를 부정하겠다는 심사가 뻔했다. 북한군 반공포로 대부분은 남한 점령지에서 징집된 청년들이었다. 송환된 소련 포로들의 시베리아 고난도 께름칙했다. ‘거사’를 결심한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수용소 경비 병력을 헌병사령부 소속으로 바꾸었다. 헌병사령부는 국방부 직속이라 국제연합군 사령부의 지휘권 밖이었다.
1953년 6월 6일 새벽 전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북한에 남겨진 미군포로의 석방 교섭에도, 진행 중이던 휴전협정에도 장애가 되었다. 대신 남한 청년 2만 6천 명이 자유를 찾았다. 꽤 많은 중공군 포로도 중공 대신 대만을 택했다. 장개석은 패전 후 돌아 온 대만 출신 일본군 3만 명을 다시 징집하여 국공내전에 투입했다. 그중 상당수는 중공군 포로가 되었다. 1950년 겨울 모택동은 ‘인민지원군’ 완장을 채워 이들을 압록강 얼음판으로 쫓았다. 대만을 택한 중공군 반공포로는 이들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들이었다.
보관용 기록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