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멘토가 3분이 계시다. 삼성 서울병원 박윤수 교수님,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김용정 교수님 그리고 애양병원의 김인권 원장님이시다. 그분들 중에 애양병원의 산 증인이신 김인권 원장님께서 오늘 날짜로 애양병원에서 33년의 직장생활을 정년으로 정리하시는 날이다. 감회가 새롭다. 후임 병원장이 내가 될 수 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도 해본다.ㅎㅎㅎ 그럼 내 인생 정말 아름다웠을 것이다. (후임 병원장은 내 근무 당시 이미 마취과 과장으로 계시던 아주 좋은 분이시니 더욱 잘된 일이다.) 아마 신앙적인 인간으로서 이분을 따라갈 의사가 우리나라에 몇분 안계실것이라 믿는다.
1997년 군대 제대후 수술에 대한 미련이 많아 삼성 서울 병원에 전임의로 자원 했다. 사실 워낙 유명한 병원이라 내가 붙으리라 기대도 안했다. 서류 전형에서 추천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굳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 내 정형외과 스승님께 추천서 부탁하기도 껄끄러워서 내가 내 자신을 추천했다. (그 당시에는 참 겁없이 혈기가 왕성했다.) 논산에서 군 생활 하면서도 몇 번 병원으로 무작정 찾아뵙기도 하고 손 편지도 썼다. 아마 뭐 이런 놈이 있나 하셨을 것이다. ( 이런 큰 병원의 전임의사 지원자는 지도 교수의 추천서와 추천 전화 지원도 받고나서 어느정도 내정되어 우아하게 인사드리러 가는 것이 상식인데 말이다.) 하지만 결국 박윤수 교수님은 다른 지원자를 포기하게 만들고 나를 뽑아주셨다. 평생 갚지 못할 감사한 일이다. 지금도 누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생활하면서 존경을 표시하고 있다.
(1996년 강원도 군의관시절 동계훈련장에서)
그렇게 정형외과 인공 관절의 세계로 입문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다. 최첨단 시설의 너무나 멋진 삼성병원에서의 근무 자체가 신났고 수많은 수술 경험으로 가슴이 벅찼다. 논문도 여러편 만들면서 학회에서 발표도 하고 해외 학회 나가서 좋은 경험을 했다. 그런 세월을 1년여 보내고 사회로 나와 취직을 하게 되었다. IMF 시절이라 교수직 자리도 줄어드는 세상이라 취직 자체만으로도 감사해야할 일이었다. 난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몇 군데 병원 중에 성남의 병원을 찾아가서 인공관절 수술 실력을 원장에에 직접 보이고 담판을 지었다. 취직만 해도 감사할 시절이었지만 나는 패기로 월급을 훨씬 더 올려받기로 했다. 참 자신감이 넘쳤던 시절이었다. (너무 패기만 높아 취직한 성남 정병원 원장님과 인간적으로 거리를 조금 만든 것은 내 인성이 조금 부족해서였다. 참 열심히 사는 분이었는데 내가 내것만 챙겼다. )
( 3 층은 내가 근무할 당시 증축했다.)
그러다가 정년하시는 스승님의 후임으로 서울 삼육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도 인공관절 수술을 하면서 많은 변화를 만들었다. 마취과 과장님이 놀랠 정도로 인공관절 수술 시간도 짧아졌고 병동 간호사들이 신기해 할 정도로 수술 후 환자를 바로 걷게했다. (과거에는 3시간 가까운 수술에 병실에서는 가만히 누워서 1주일을 보내게 했는데 난 1시간 이내의 수술후 병실에서는 환자를 다음날 바로 걷게 했다.) 스승님도 뿌듯해 하실 만큼 기존 치료 기법을 크게 현대화 시켰다. 하지만 3차 종합 병원이 아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인공 관절 수술이 한계가 있었다. 항상 힘은 남아돌았고 더 많은 수술을 갈망하고 있었다. 종합 병원에서 선하신 선배님과 스승님들을 모시고 나 또한 전문가 스승로서 대접받으면서 수련의 제자들을 키우는 보람도 있었지만 수술에 대한 갈증이 자꾸만 커져갔다.
그러던차에 <MBC 칭찬합시다> 프로그램에 여수애양병원 김인권 원장님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전혀 모르던 분이었는데 방송에서 보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서울대학을 나오고 잘생긴 외모에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도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을 보는 그 분이 참 존경스러웠고 무엇보다 정형외과적으로 수많은 수술을 하고 있다는 점이 내게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분의 과거 인터뷰를 보면서 저런 분과 한번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주체할 수 없어 방송국에 테이프를 신청해서 집에서 계속 보고 또 봤다. (김인권 원장님은 수련의 시절 남들보다 힘든 소록도 근무를 자원했고 그곳에서 토플 선교사를 만나 “한국에는 의사가 많은데 왜 자신이 아직도 이곳에 있어야하는가?“ 하는 말씀에 본인이 이곳으로 오겠다고 약속했다한다. 토플 원장님은 그 이후 애양병원을 넘기고 케냐로 가서 지금도 봉사활동을 부인과 같이 하고 계신다.) 그런 나를 안쓰럽게 여긴 아내의 제안으로 우리는 같이 여수 애양병원으로 비행기 타고 가서 면담을 했다.
(국가에서 아주 아주 구석에 한센병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그곳에 선교사가 병원을 세웠건만 세월을 흘러서 그곳 바로 옆에 여수 비행장이 있어 전국의 환자들이 애양병원으로 모일 수 있게 되어있으니 이또한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다.)
해변의 병원은 아늑했지만 나환자촌 특유의 돼지 닭 사육하는 시골 특유 냄새가 났다. 내가 대학생시절 기독청년회(CMF) 소속으로 한 나환자촌으로 수련회를 가서 그곳에서 나병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아주머니를 반갑게 포옹하는 어린 여학생자매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와서 보니 바로 그 장소였다. 이것은 운명이었다.
(과거에는 치료를 받지 못한 나병환자들이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전통있는 선교사 병원( 당시 거의 100년 가까이 되었음) 이라 모든 것이 누추해도 난 이상하게 좋았다. 내가 태어난 여수라는 것도 좋았고 의사 김인권이라는 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방문한 당일에도 오전 3시간동안에만 인공관절 수술을 5케이스나 하는 이해가 안되는 불가사의한 병원이었다. (삼성의료원에서 하루 종일 해도 5개가 최대다.) 원장님을 뵙고 아내는 내게 1년의 기한으로 허락해 줬고 원장님께서도 오래 있으면 좋지만 최소 1년이라도 약속하고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병원이 외진 곳이라 의사를 구할 수 없고 월급도 박해서 1년만이라도 근무한다는 의사를 반겼지만 난 허락을 받아 김인권 원장님과 근무한다는 그 자체가 영광스럽고 감사했다. 내가 운좋게 인공관절 전임의를 한 것이 이곳으로 오기위한 하늘의 뜻이라 생각했다.
( 당시에는 한센병-나병- 환자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40여명이라 한다.
지금은 약이 좋아져서 2주일만 먹으면 한센병 후유증도 없이 잘 낫는다.
오히려 결핵보다도 가벼운 질병이 되어버렸다. )
1월1일 부터의 병원 생활은 정신 없었다. 하루에 5개 보면 최대인 수술을 10개 이상 보고 그 외에도 특별한 수술들을 보면서( 뇌성마비 기형 수술, 나병 기형 수술, 골수염, 골 연장 수술 ,허리 수술 등) 공부하고 정리하면서 행복했다. 무엇보다 서울의 병원에서 여러 기구를 사용해서하는 방법 보다도 열악한 환경에서 최소의 기구를 가지고 수술하는 애양병원 십수년간의 노하우가 내게는 너무나 신선하고 멋있었다. 내 자신이 전천후의 외과 의사로서 엄청난 성장을 느낄 수 있었다. 곧바로 나 역시 많은 수술을 원장님과 대등하게(?) 하기에 이르렀다. 매일 병원식당에서 파리 뿌리치며 먹는 밥이 맛있었고 바닷가 숙소라 손위 돈벌레라는 지네처럼 생긴 벌레가 많이 출몰해도 난 좋았다. (피곤해서 골어떨어져 자는데 천정에 있던 벌레가 얼굴로 떨어지기도 했다.) 서울에서 일요일 밤 기차를 타고 내려와서 새벽에 도착해 바로 근무에 들어가고 일주일 내내 정신없이 살아가 토요일 오후에 서울로 돌아가 아이들을 보는 삶이 반복되었다. 새벽5시에 도착해서 약 한시간 버스가 올 때 까지 작은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추위도 내겐 아무 문제 없었다. 대신 연휴 때는 귀경하지 않고 병원을 지켜서 동료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다. 병원 옆의 벌레나오는 허름한 숙소 였지만 간간히 혼자 밥도 해먹으면서 공부도 열심히했다. 물론 기독교 병원인만큼 신앙생활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환자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잘 사는 간호사, 나병 때문에 집안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왔는데 열심히 일해서 가족에게 돈을 부쳐주는 장로님, 코 없이도 밝은 웃음 잃지 않는 요양원 노인들을 보면서 신앙의 중요성과 가치를 많이 깨달을 수 있었다. (과거 수십년간 수많은 나환자들이 단지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친하던 마을 사람들로 인해서 쌀가마니에 말려 뚜드려 맞아 죽고 시체를 병원 입구 오솔길에 버려졌었다한다. 그것을 이곳 주민들은 바로 앞 섬에 묻었는데 그래서 요즘도 간혹 섬에 도깨비 불빛이 보인다니 우리나라는 참 한심할 뿐이다. 일본이 일제시대에 이런곳을 따로 안 말들었으면 아마 전국에서 맞아 죽거나 굶어 죽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 의사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성숙되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 최근 증축한 여수 애양병원. 우측 아래 2층짜리 하얀 건물이 었는데 이렇게 변신했으니 신앙의 승리다.)
하지만 가을이 되어가면서 나는 지치고 어두워졌다. 조금씩 나와 맞지 않는 것이 눈에 보였고 괜한 트집을 잡기 시작하면서 병원 생활이 더 힘들어졌다. 원장님께도 1년을 채우고 떠나겠다고 말씀 드리니 서운해 하셨다. (아니면 속편해하셨을까? ^_^)시간이 갈 수 록 내가 계속 있을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는데 하필 내 선임자가 먼저 병원을 사직해서 원장님과 단 두명이 모든 것을 해야할 상황이 되었다. 일은 힘들고 사소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원장님은 모든것은 다 하나님께서 해결 해 주신다고 하시면서 인력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거리낌 없이 너무나 많은 일을 만들어 내셨고 ( 수술건수는 매일 기록을 갱신하고 모든 직원들은 치쳐갔다.) 원장님께서는 발목 골절이나 갈비뼈 골절이 되어도 본인이 병가도 내기 않으시고 통증을 참으면서 수술을 직접 다 하셨다. 신앙심이 깊지 못한 나는 그것을 이해 못했다. 좀 여유를 갖고 환자를 보고 싶었지만 병원은 정신없이 돌아갔고 수술후 염증 환자도 자주 보였다.(워낙 많이 수술하니 그만큼 부작용도 더 보였지만 통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떠나면 뻔히 힘들어질 원장님을 생각해야하는데 나는 도저히 계속 있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여러 가지 사건들로 마음이 떠나있었고 그것이 내 한계였다.
나는 100년전 서양 선교사가 미국에서 건너와 나환자를 치료하면서 현재에 이르는 성스러운 이곳에서 계속 근무할 그런 수준의 사람이 아니었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질 판이다. 내 수준을 인정해야했다. 일주일 내내 그렇게 일하시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며서 삶을 사시는 김인권 원장님을 뵈면 존경스러우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완벽했다. 분명히 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온화한 미소 속에서 엄청나게 강한 자존심과 신앙심을 보고 느끼면서 나는 존경심을 넘어서버렸다.
결국 달란트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병원을 크게 성공해서 기부금으로 이곳 병원에 헌신하는 것이 나의 달란트라 믿고 개업준비를 하게 되었다. 당시 계획으로 약 5개 정도의 의원으로 브랜치를 만들어 내가 돌아가면서 수술 해주면서 키우고자 했다. 병원 이름도(해든) 상표 등록하고 그 만큼 수술에 자신이 있었다. ( 당시에는 지금의 전문병원은 없었고 나름 성공한 예치과의 경영을 벤치마캉했다. 내가 개업하고 7개월후 힘찬 병원이라는 전문 병원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시작 되었다.내가 애양 병원에서 조금만 더 근무했으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간혹 생각한다. 힘찬병원 원장이 같이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양병원까지 왔었다하니 말이다. )
( 지금은 수술방에서 보이던 남해 바다가 시설물들이 많이 보인다. 좌측의 섬이 도깨비 섬이다.)
12월 31일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모든 짐을 쌓고 서울로 올라왔다. 다행히 의사 한명이 들어오고나서 떠나니 내 마음이 조금은 덜 불편해졌지만 여전히 그 친구는 미숙해서 뻔히 힘들어질 원장님께 죄송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도로에 눈은 많이 오고 마음은 찹찹했다. 수술이 많아서 원장님이 분명히 힘들 텐데도 난 그냥 매정하게 떠나버렸다. 사람이 부족한 것을 알면서 원장님은 수술을 최대한으로 계속 잡으셨다.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신다면서 말이다. 떠나는 나는 그것도 불만이었다. ( 북한의 공격가능성 때문에 전우들과 같이 하려고 전역을 미룬 십수명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내가 참 부끄러울 뿐이다.) 원장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어정쩡하게 끝났다.
그래도 개업 후에도 수술 기술을 잊지 않기 위해 매월 한번씩 찾아뵈면 나를 거부하지는 않으셨지만 마음은 서운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내 변명을 하자면 나 역시 약속대로 애양 병원에서 운영하는 사마리아 기도회에 현재까지도 매년 수십에서 수백만원씩 기부하면서 죄책감을 덜어내고 있다. 다행히 내가 떠난 이후로 더 좋은 의사들이 들어와서 병원은 더욱 커졌다.(하나님의 섭리인듯^_^) 현재는 하루에 35개정도 의 수술이 이루어질 정도로 병원은 승승장구 하였고 크게 증축하여 너무나 멋진 병원으로 탈바꿈 되었다. 직원들의 노력 그리고 큰 신앙심이 이룬 결과라고 믿지만 사실 김인권 원장님의 작품이라해도 과언은 아니다 . 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대의 결과물은 낳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기네스북 감이다. 내가 있을 당시에는 중국 연변으로 수술 봉사를 갔었는데 베트남을 (베트남 수술은 나도 한번 동참했었다.) 거쳐 요즘은 미안마로 가서 수술 해주고 계시다한다. 신앙은 사람을 참 위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신앙의 힘에 탐복할 뿐이다.
( 개업하고 김인권 원장님의 해외 의료 봉사에 참가했었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그분 곁에서 조용히 내조해주신 사모님이 오히려 더 대단하신 분이다. 서울 압구정도 토박이 아가씨가 이상한(?) 고집불통 독실한 기독교 신자 의사와 결혼해서 첫 아를이 낳고 4일만에 순천으로 가자는 남편따라 1년만 근무한다는 말에 속아 내려와서 35년 이상을 순천에서 사셨으니 얼마나 힘드셨겠는가? 과거 선교사가 쓰던 숙소는 천정에서 비가 새서 대야를 십여개 둬야했고 커가는 아이들은 서울에서 흔한 과외 한번 없이 시골 아이들과 같이 클 수 밖에 없었다니 세련된 서울 사모님은 얼마나 답답했었겠는가?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딸과 아들은 변호사와 의사로 컸으니 그런 것 보면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 같다. 모든 것이 깊은 신앙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조부님 시절부터 평양에서 기독교 집안이었으니 모든 유전자는 그렇게 위인을 만드나 보다. 역시 집안의 가풍은 중요한 것이다.
당시 나와 근무하시던 원장님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다. 하루에 200명 이상의 환자를 보고 수술도 20개 가까이 하셨다. 먼 섬에서 오는 환자를 보낼 수 없어 그낭 응급으로 수술 하기를 밥 먹듯이 해서 퇴근은 항상 8시를 넘기는데 원장실 들어가서는 또 밀린 일을 하시느라 더 늦게 퇴근하신다. 젊은 직원들도 다 녹초가 되는데 그 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순전히 정신력일 것이다. (간혹 힘드실까봐 가방을 들어 드리려하면 심하게 싫어하셨다. 오히려 선의로 가방 들어드리려던 내가 무안할 정도였다. 그만큼 자존심이 강하셨다.) 난 비교할 생각이 전혀 없다.나와는 비교도 안되는 달란트가 따로 있으신 분이니까. 솔직히 나는 한번 사는 인생 그렇게 수도원 수사처럼 살고 싶지도 않다. ^_^
그러던 원장님이 정년퇴임을 하신다. 머리도 많이 하얗게 변하셨다. 여전히 잘생기셨다. 웃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남들 눈에는 안보이는 강한 독기가 내게는 보인다. 그래도 아직 정렬적이고 환자를 위해서도 필요한 존재라 명예 원장님으로 조금 더 근무하신다니 병원을 위해서도 너무나 다행이다. 애양병원과 같은 전통과 가치가 있는 병원은 계속 유지 되어야한다. 지금 아들이 정형외과 의사인데 (모교인 서울대학교 정형외과 레지던트1년차) 그 아들이 아버지 뒤를 이으면 좋겠지만 본인에게는 또 엄청난 스트레스일 것이다. 아버지 김인권이라는 너무나 큰 파도를 넘어서기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할 것이니 말이다. 그냥 행복하게 자기 달란트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김인권 원장님의 정년퇴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제게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셔서감사합니다. 저는 제 자리에서 지금처럼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원장님과 비교할 생각을 추호도 없습니다. 불가능할 뿐이니까요.ㅎㅎㅎ 그리고 오늘 저녁은 사모님과 즐거운 시간 갖으십시오.
원장님께서 이렇게 멋진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사모님의 사랑도 큰 이유 중 하나이니까요.
건강하게 내일도 또 열심히 수술하시면서 좋은 의사상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시절 살아가면서 제게 많은 배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묵묵히 그러나 꾸준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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