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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용 기록집

책임과 사회적 책무성 ( 권복규 교수님 컬럼)

최근 의료계에서 유행하는 단어가 사회적 책무성(social accountability)이다. 이 단어는 대체 무슨 뜻인가?
이 책무성은 책임(responsibility)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누가 과연 생각이나 해 보았나?
의사는 사회에 대해 책임(responsibility)이든, 책무성이든 하여튼 뭔가를 지고 있는가? 왜 그러한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한가?
이는 의사가 자기 환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과는 또 다르다. 의사는 자기에게 온 환자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것은 당사자 간에 일종의 계약이 성립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상호적 책임이다. 환자는 의사의 지시에 따르고 진료비를 내야 한다(보험제도라는 건 보험자가 환자를 대리해서 진료비를 내어 주는 제도이다). 의사는 반면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 진료해야 하고 그의 이해관심(interest)을 우선시해야 한다. 여기서 이해관심은 이득(benefit)과는 다른 개념이다.
 
 
헌데 사회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의료시스템을 채택한 국가라면 의사는 뭔가 그러한 책임을 진다고도 할 수 있다. 국가가 의사를 교육시켰고 국가가 채용했고 임금을 준다. 그의 서비스는 개별 환자가 아닌 사회 전체를 향한 것이다. 그러니 책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의학교육에 한 푼도 쓰지 않고, 의료기관 개설에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오로지 세금만을 알차게 뜯어가고 각종 규제로 옥죌 뿐이다. 의사가 사회에 가져야 하는 무언가는 죄다 법률로 제정되어 있다. 의사는 국가건강보험제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파업도 할 수 없으며, 비보험 진료도 할 수 없으며 등등.
 

 

또 하나, responsibility인가 accountability인가? 그게 그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 많다. 하여튼 그런 질문이나 하는 게 후진국 맞다. 문명국이라면 정확한 개념을 사용해야 할 것 아닌가? 왜 영어는 어슷비슷한 이것을 굳이 구분해 두었을까? 개념이 왜 중요한가? 근본 개념부터 혼동해 버리면 거기서 파생한 온갖 이상한 주장들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responsibility는 누가 직접적인 책임, 의무가 있는가를 묻는다. 오늘 당직 누구야? 라고 할 때의 그 책임이 responsibility다. 이때 accountability를 쓰지는 않는다.
accountability는 보다 상징적이고 간접적인 수준에서, 책임감을 느끼는 당사자가 갖는 의식을 의미한다. 그러니 의사의 social accountability라는 말을 쓰지 social responsibility로 쓰지 않는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에 대해 의사는 accountability를 느낄 수 있지만, responsibility는 그런 의료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공무원이나 정치인에게 있다. 나쁜 시스템으로 인한 악결과의 책임을 의사에게 묻는다면 그건 터무니없는 일이다. 의사에게는 책임이 없다. 다만 좋은 의료제도를 지향하는 안타까움과 그에 대한 책임의식은 가질 수 있다.
 
 
최근 인증평가를 하면서 이제는 의과대학의 사회적 책무성 운운한다. 그게 과연 뭔데? 무슨 사안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라면 그런 건 없다. 응급실 뺑뺑이에, 필수과 몰락에, 의료 붕괴에 의과대학이 책임이 있다는 말인가? 그거 원인 제공자가 누군데? 다만 의사든 의과대학이든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책임의식은 가질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의과대학이라면 아카데믹한 연구를 통해 원인을 규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의사를 엘리트, 사회지도층 운운하며 무슨 조선시대 선비로 착각한 나머지(특히 의대 교수들은 "교수"신분이라 그러한 경향이 좀 더 강하다) 사회의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걸 무슨 사회적 책무성이라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기본 개념부터 좀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무슨 사회봉사를 하고, 지역사회 보건문제를 해결하고(이 좁은 나라에서 지역사회 특유 보건문제라는 게 과연 있는지?) 등등이 아닌 것이다.
 
학문으로서 의료인문학이 왜 필요한가? 이러한 기본 개념부터 다지고 넘어가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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