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 자유시 참변때 동료 독립군을 몰살시킨 부대 편에 서다. 레닌을 만나 선물과 격려를 받고 소련공산당에 입당>
ㅡ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 2021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 및 대전현충원에 안장 ㅡ
홍범도(1868~1943)가 1920년 6월 벌였다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승했다는 것은 여러 사료로 보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봉오동 전투에서 '사령관'은 최진동이고 홍범도는 '편장'이었는데,
'봉오동 전투'라는 영화를 보면 홍범도가 작전 지도를 펼치고 마치 모든 것을 지휘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는 최진동이 중일전쟁후 변절해 친일부역을 했기에 손절된 탓이다.
홍범도는 사상적 동지였던 이동휘의 선전에 속아 1921년 6월 자유시로 이동해서는 소비에트 적군과 함께 동료 독립군을 몰살시키는 부대 편에 섰다.
1922년 레닌으로부터 소련 혁명정부에 협조해준데 대해 감사의 표시로 격려금과 권총까지 선물받고,
1927년 소련공산당(볼세비키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되었다.
1. 봉오동.청산리전투 여파로 한인마을 쑥대밭
1920년 6월, 10월 봉오동·청산리에서 독립군과 격전을 벌인 일본군은
독립군 근거지를 말살하기 위해 북간도의 훈춘,왕청, 화룡, 연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경신(庚申)참변)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간도지역은 초토화되어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었다.
이후 만주를 무대로 하는 한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은 현저히 퇴조했다.
홍범도, 김좌진을 비롯한 한국 독립군은 각자도생하기 위해 일본군 포위망을 뚫고 뿔뿔이 흩어졌다.
2. 이동휘는 레닌의 후원을 받고 임시정부 공산화 작업
(1) 이동휘, 임정 명의로 레닌정부와 공수동맹
1920년 8월, 상해 임시정부의 실세이자 국무총리였던 이동휘(1873~1935)*는 비밀리에 모스크바에 밀사를 보내
‘대일한로공수동맹(對日ㆍ韓露攻守同盟)’을 체결했다.
* 한인사회당 당수 : 1918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조직, 1921년 5월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개칭
그러면서 소비에트 레닌정부로부터 금화 100만 루블이라는 엄청난 자금을 지원받기로 했다.
체결 내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산주의를 수용토록 하며,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 중인 한인 무장부대를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편입시킨다는 것이었다.
(2) 레닌과 약속대로 임정 공산화 시도
몇 차례에 걸쳐 코민테른 자금을 레닌으로부터 수령한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이후 일관되고 집요하게 임시정부 공산화 작업을 진행했다.
이동휘는 이승만의 친미 외교독립노선을 비판하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손잡고 임정을 한인사회당 계열이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이동휘는 “대한이라는 낡은 이름을 버리고 ‘조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자”고 제안했으며,
태극기를 폐지하고 푸른 천에 세 개의 붉은 별이 있는 국기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임정을 혁명위원회로 개편하고, 시베리아로 옮기려 했다.
이런 급진적 주장은 임정 내 민족주의 세력인 이동녕·신규식·이시영·안창호 등에게 거부당했다.
이동휘는 임시정부 개혁안(공산화안)을 국무회의에서 표결에 부쳐 처리하려 했으나 부결되자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3. 이동휘에게 속아 자유시로 이동한 홍범도
(1) 이동휘, 레닌과 약속대로 한인부대를 적군산하 편입 추진, 자유시로 집결 유도
이동휘는 레닌에게 돈을 받은 댓가로 추진한 임정 공산화가 실패하자 임정을 탈퇴하고,
이번에는 레닌의 요구대로 간도·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를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편입시키기 위해
이들을 시베리아 영내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뚜렷한 명분이나 이유 없이 부대를 이동시킬 수는 없는 일이므로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를 통합하여 단일 지도부를 구성하면 레닌정부가 도와주기로 했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한인 무장부대의 집결지는 레닌이 지정한 극동공화국 영내의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정해졌다.
(2) 소비에트정부 : 일본과 밀약, 독립군처리 약속
한편 소비에트 정부가 한국 독립군을 적군 산하로 편입시키기로 한 것은 일본과의 밀약 때문이었다.
당시 7만 대군을 시베리아에 파병한 일본은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을 지원했다.
일본은 시베리아 철군을 위해 소비에트 정부와 다롄(大連), 창춘(長春)회담에서
철군 조건으로 만주·연해주 일대의 한국 독립군에 대한 ‘처리’를 요구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한다.
4. 한국독립군, 자유시에 집결, 두 파벌 다툼
(1) 자유시에 집결
1921년 홍범도를 비롯하여 한인 무장부대 3,500여 명이 이동휘의 선전에 휘둘려 자유시에 집결한다.
민족주의 성향, 공산주의 성향, 무정부주의 성향 등 잡다한 세력의 집합체였다.
이 무렵 시베리아 일대의 한인 공산주의 세력도 두개의 파로 분열되어 반목하였다.
1) 대한국민의회(이르쿠츠크파) : 적군 산하 편입 주장, 자유대대
2) 한인사회당(상해파) : 적군산하 편입 반대, 사할린 부대(니항부대)
이 와중에 한인 무장부대가 자유시에 집결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이들을 서로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였다.
그 결과 한인 무장부대는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에 동조하여 적군 산하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갈라졌다.
이르쿠츠크파 무장세력의 핵심은 자유대대였고, 상해파의 주력은 사할린부대였다.
(2) 홍범도의 변신, 이로쿠츠크바로 돌아서다
상해파 편에 섰던 홍범도는 양파의 반목이 점점 심각해지고,
이르쿠츠크파의 배후에 소비에트 정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6월 2일 홍범도는 안무, 최진동, 지청천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파로 돌아섰다.
5. 자유시 참변 : 한국 독립군을 학살하는 부대 편에 선 홍범도
(1) 소비에트 적군과 자유대대가 한편이 되어 사할린부대 공격
사할린부대(상해파)가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의 편입을 거부하자
소비에트 정부 적군(극동공화군 군대)은 6월 28일 새벽, 수라세프카에 주둔 중이던 사할린부대를 포위했다.
오후 2시, 소비에트정부군과 함께 자유대대(이르쿠츠크파)가 사할린부대를 공격했다.
그들은 기관총과 대포, 장갑차를 앞세워 적군 편입을 거부한 사할린부대를 무차별 학살했다.
자유시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한 부대는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던 의군부 대원들이었다.
한국 독립군은 비참하게 자유시 일대에서 동료들의 손에 사살당하거나, 제야강에 빠져 익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한국 독립운동의 흑역사로 기록된 ‘자유시참변’이다.
포로가 된 독립군 428명은 죄수부대로 편성되어 우수문 벌목장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나머지 72명(대부분 장교)은 중대범죄자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자유시 참변 당시 희생된 한국 독립군은 700~800명, 부상자 수백 명, 벌목 노동장으로 끌려간 인원수는 1,000여 명이 넘었다.
이로써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홍범도, 한국 독립군을 학살하는 부대 편에 서다
홍범도는 자유시참변에서 소비에트 적군 세력에 동조하여 한국 무장독립군을 몰살시키는 이로쿠츠프파 편에 섰다.
그리고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한국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서
홍범도는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위원으로 참석한다.
6. 이동휘와 레닌 정부가 체결한 공수동맹대로 한국 독립군이 깨끗하게 해체되다.
(1) 고려혁명군 여단으로 재편, 적군 산하로
자유시참변이후 홍범도를 비롯한 생존자 2,000여 명은 고려혁명군 여단으로 재편되었다.
1921년 7월 5일 코민테른은 고려혁명군에게 이르쿠츠크로의 이동을 명령한다.
그들이 이르쿠츠크에 도착 즉시 소비에트 정부는 한국 독립군 전원을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예속시켜버렸다.
이로써 이동휘가 레닌 정부와 체결한 공수동맹,
즉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한인 무장부대를 소비에트 적군에 귀속시키는 작업은 완벽하게 이행되었다.
적군 산하로 편입된 고려혁명군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정신의 함양, 즉 공산화를 위한 혁명 교육에 돌입한다.
제1대대장에 임명된 홍범도는 스스로는 독립군 사령관을 저처했지만,
그의 공식 직함은 적군 내의 한인 빨치산(의용군) 대장이었다. 그의 나이 53세 때의 일이다.
(2) 고려혁명군 여단, 깨끗이 강제해체
고려혁명군 여단은 1922년 4월 13일, 상부 지시에 의해 연대로 재편되면서 병력을 절반으로 축소했다.
한국 독립군 중 1,000여 명은 강제 제대시켜 연해주로 돌려보냈다.
같은해 9월에는 “한인부대의 임무는 완수되었다”면서 고려혁명군 해산을 명령했다.
이동휘의 선전에 속아 자유시에 집결했던 한국 무장독립군은 이로써 깨끗하게 해체되었다.
6. 레닌에게 격려금과 권총 선물로 받은 홍범도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열렸다.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미·영·불·일이 아시아·태평양 일대의 신질서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에 맞서 코민테른은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제1회 극동 제(諸)민족대회 (극동인민대표대회)를 열었다.
홍범도는 제1회 극동 제민족대회에 참여하는 한인 대표 52명 중 일원으로 선출되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대회가 끝난 2월 초 홍범도는 한인 무장세력(고려혁명군) 대표 자격으로 레닌-트로츠키와 면담했다.
레닌은 홍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준 감사의 표시로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
7. 결국 팽당한 홍범도, 털빠진 호랑이 눈 감다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동료 빨치산들과 함께 4년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양봉을 했으나 실패했다.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1928년 7월부터 1929년 가을까지 이만 남쪽 스파스크 진동촌으로 이주하여 항카호 옆에서 농사를 지었으나 이것도 실패했다.
1937년 9월 초, 홍범도는 스탈린의 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된다.
그가 버려진 곳은 카자흐스탄의 시르다리야강 근처 전 아뤼크촌 사막지대였다.
1938년 4월, 생활환경이 좀 나은 크즐오르다로 이주한다.
크즐오르다의 조선극장의 수위장에 임명된 홍범도는 1943년 10월 25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문재인정부 시절인 2021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다시 안장되었다.
* 정상국가, 정상사회를 향한 멀고 험한길
(펜앤드마이크, 22.6.9), 나무위키 등 참조
또 다른 해석
홍범도는 명백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1920년 전후로 연해주로 넘어가 이동휘 등과 연계를 맺던 시절부터 사회주의 경향을 띠었다.
‘자유시 참변’은 레닌 정부가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독립군을 제거하려고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모이게 한 뒤 소비에트 적군으로 편입시키려다, 반발하는 한인 독립군을 기관총과 장갑차를 동원해 무차별 공격하여 학살한 사건이다. 가해자는 레닌 정부 산하의 ‘극동 공화국’ 적군과 이르츠크파 공산당이었다.
‘자유시 참변’으로 3500여 명에 달하던 한인 독립군은 400~600명이 사망하고, 익사자와 실종자 등이 100여 명에 달하고, 700명 정도가 포로로 잡혔다. 포로로 잡힌 독립군 중 72명의 독립군 장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받고, 벌목장에서 강제노역으로 죽어갔다.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 청산리 전투의 주력부대였던 ‘의군부’였다.
이때 홍범도는 가해자 측인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담한다. 30일자 ‘한겨레’는 좌파 역사학자들이 이를 "통합하기 위한 중재자 역할(윤상원 전북대 교수)"이라거나 "학살에 참여하지 않고 통곡했다(한국독립운동사 자료)"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또 3인의 재판위원 중 1인으로 활약한 것도 "(독립군을) 구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홍범도의 변절에 대한 ‘한겨레’와 좌파 역사학자들의 구차한 변명이다. ‘자유시 참변’ 후 모스크바의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한 홍범도는 트로츠키와 레닌을 만나 감사 인사를 받고, 100루불의 금화와 군복과 권총을 하사받는다. 그 후 홍범도는 적군 소속 고려혁명군 대위가 되었다.
또 고려혁명군은 아무런 전투도 벌이지 않았고, 적백내전에서 적군의 승리가 확정되는 1922년에 그 임무가 끝났다며 코민테른으로부터 해산명령을 받았다. 해산된 홍범도 등은 항카호 근처에서 재혼해 농장(콜호즈)을 일구고 살면서 1927년에 정식으로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농장에서 일하던 1923년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 측인 사할린파 김창수와 김오남이 홍범도의 배신행위를 추궁하며 공격했다. 그들의 공격으로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자, 홍범도는 레닌이 하사한 권총으로 이들을 살해했다. 그 일로 홍범도는‘살인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레닌이 친서를 써주어 석방되기도 했다.
레닌의 단독 면담과 감사 인사, 군복과 권총, 금화 100루불 하사, 그리고 피해자 측인 사할린파 김창수, 김오남의 공격은 홍범도의 행적이 ‘한겨레’서 소개한 좌파 역사학자들의 구차한 변명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인 독립군을 제거하는 소련 공산당의 의도에 동조해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고, 그 공으로 레닌과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은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용삼 칼럼리스트는 "사상적 동지였던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해 동료 독립군을 몰살하는 편에 섰던 사람이 홍범도다"라며 "그래서 레닌으로부터 고맙다며 격려금과 권총까지 선물로 받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홍범도는 1941년 독소 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의 신문인 ‘레닌 기치’에 스탈린에게 공개 충성편지를 썼다. 당시 72세였던 그는 스탈린에게 "비록 몸은 늙었지만, 전선에 나가 싸우고 싶다"고 했다. 또 ‘레닌 기치’에 투고하며 고려인 청년들에게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라는 참전 독려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1943년 그가 사망하자 소련에서는 고려(대한)의 독립운동가라는 말 대신 "조선 빨치산 운동의 거두, 레인-스탈린당의 당원, 조국(소련)과 볼세비키당에 충직한 사람"이라는 부고 기사가 났다(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
그가 살아 있다면 대한민국 육사에 동상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 어리둥절해 할 것 같다. 어쩌면 화를 낼 수도 있다. 소련과 볼세비키당에 충직한 사람인데 왜 러시아 군사학교나 붉은광장에 동상을 세우지 않느냐고..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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