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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의 의사日記] 교도소 담장 위에서 의료인 자부심 사라진다
● 최저가에도 잘 고치던 한국 의료
● 저수가와 과도한 의료소송으로 위기
● 일본 260배 넘는 의료인 형사기소
● 의료사고 민·형사적 처벌 부담 완화要
“이러면 나가린데….”
영화 ‘신세계’에서 강 과장(최민식 분)이 비밀 회합장소에 자신을 죽이러 온 중국 해커들을 보며 주인공 이자성(이정재 분)에게 배신당한 것을 알고 읊조리던 대사다. 영화에서 강 과장은 지방에서 순경으로 복무하던 이자성에게 승진과 돈, 안전보장을 약속하며 그를 폭력 조직 ‘골드문’에 잠입시킨다. 이자성은 강 과장에게 골드문과 정치권이 연관된 비리 자료들를 건넸다.
이자성이 신분 노출 위기에 시달리자 이 합의는 무너진한다. 강 과장의 죽음으로 둘의 원래 목표였던 정치권과 폭력배의 결탁 감시는 무산된다. 이자성은 잠입 경찰이라는 정체성을 내려놓고 골드문의 일인자가 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정부와 의료계 사이에도 합의가 있었다. 낮은 진료 수가의 국민건강보험을 강제하는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를 받는 대신 의사의 전문가적 권위를 인정해 주고, 다른 나라에 비해 적은 의사 수를 유지하게 해준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은 가성비가 좋은 의료 체계를 확보했다. GDP 대비 경상의료지출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9.7%)보다 적게(9.3%) 쓰고도 기대수명이 OECD 평균(80.3세)보다 높고(83.6세), 10만 명당 회피 가능 사망률 또한 OECD 평균(239명)보다 높다(142명).
그런데 최근에는 응급환자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해 사망했다는 소식이 자주 보도된다. 환자를 담당할 의사가 없어서다. 필수 의료인력 부족 현상은 의료 체계 붕괴의 신호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의료진 부족 현상은 왜 시작된 걸까.
생명 살린다는 자부심 있었지만…
한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의료비가 낮은 편이다. 한국 인공슬관절치환술 수가는 약 70만 원, 캐나다와 프랑스는 약 1300만 원, 중국 923만 원이다. 자연분만 수가도 한국이 가장 낮은 편이다. 미국의 자연분만 수가는 1만1200달러. 영국은 9000달러, 호주 6100달러인 데 반해 한국은 1040달러에 불과하다. 충수절제술(맹장 수술) 수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약 2166달러인데 미국은 1만3020달러, 영국과 뉴질랜드는 각각 3050달러, 6710달러다.
마취 시술 수가도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낮은 편이다. 3월 대한마취통증의학회가 집계한 결과, 복부 수술 시 1시간 마취 시술의 한국 수가는 10만3700원인 데 비해 일본은 74만9914원으로 7배에 달한다. 미국은 227만3767원이다. 심장 수술 중 1시간 마취 수가는 한국이 15만5550원, 일본은 289만2945만 원이다. 미국은 454만7534원에 달한다.
시술과 수술이 아니라 진료 요금도 한국이 저렴한 편이다. 의료정책연구소 집계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미국의 초진료는 한국에 비해 미국은 7.9배 높다. 캐나다는 4.3배, 프랑스는 2.1배, 일본은 1.8배 높다. 재진료는 한국 기준 미국은 7.45배, 캐나다는 2.97배, 프랑스는 2.96배 높다.
낮은 의료비만으로 작금의 상황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1976년 의료보험법이 개정된 이후부터 한국의 의료비는 낮은 편이었다. 돈이 문제였다면 의료시스템은 진작 위기를 맞았을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바이털(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과 지원자가 많았다. 필자가 의과대학에 다니던 2008년에 산부인과 교수가 “산부인과야말로 산모와 태아의 생명을 모두 살리는 진정한 의사”라고 수업시간에 말했을 정도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명을 다루는 과를 전공한다는 ‘자부심’이 살아 있었다. 당시는 미용 관련 의학기술이 발달하며 성형외과, 피부과 등 비급여 의료 시장이 팽창하던 시절이다. 미용 관련 전공을 택했다면 고액을 벌 수 있음에도 꽤나 많은 젊은 의사들이 바이털과에 지원했다.
과도한 고소로 무너진 자부심
더 큰 문제는 ‘자부심’을 ‘자괴감’으로 바뀌게 한 의료 소송의 증가였다. 2000~2005년까지 6년간 의료 분쟁으로 인한 민사소송은 57.8% 늘었다. 소송 남용을 막기 위해 2012년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설립됐지만 분쟁은 오히려 늘었다. 2012년 의료 분쟁은 총 385건. 해마다 증가해 2019년에는 2647건에 달했다.
민사소송 패소는 종종 볼 수 있었다. 2015년 소아 선천성 심장 기형인 ‘팔로 4징증(Tetralogy of Fallot)’ 환자를 수술하다 과다출혈로 영구 발달장애가 생긴 사건이 있었다. 성공 가능성이 낮은 수술이었지만 손 놓고 있을 순 없으니 병원은 수술을 권했다. 결과가 좋지 않자 보호자는 병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8월 2일 서울고등법원 제17-2민사부(재판장 차문호)는 보호자의 손을 들어줬다. 병원이 9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형사소송도 늘었다. 2006년 의료인 피고인 수는 1명이었지만 2020년 61명까지 급증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봐도 국내 의료 분쟁의 형사 기소 경향은 지나치게 높다. 2011~2015년까지 5년간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인한 의사 100명당 연간 기소 건수는 약 0.258건, 일본이 약 0.001건으로 한국이 일본의 약 264.9배에 이른다.
한국보다 의사가 두 배 많은 영국은 최근 6년 동안 의사가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가 4건에 불과한 반면 우리나라는 670건이나 됐다. 독일은 2013~2019년까지 의사에 대한 형사처벌은 단 6건. 그마저 벌금형이 대부분이었다. 미국은 의료행위 관련 중과실치상으로 인한 경우는 약물 과다 처방 및 사용 위반의 경우만 있다.
“이러면 나가린데….” 결국 의사들이 이 대사를 읊조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7년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집단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12월 대법원은 이대목동병원 측의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에 대한 무죄판결을 확정했다.
의료인들은 마음을 크게 다쳤다. 당시 주치의였던 조수진 이대목동병원 교수는 유방암 투병을 하면서까지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아이들을 보살폈다. 하지만 이 사건 때문에 수갑을 차고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의사들은 이 사건을 통해 정부와 의료인 간 암묵적 합의가 깨졌음을 알게 됐다. 의료인이 더는 존중받지 못한다. 젊은 의사 대부분은 바이털과 전공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예비 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바이털과 인력이 부족해지자 남아 있던 소수의 전문의가 그 부담을 떠안았다. 사람은 줄었지만 환자는 줄지 않았다. 밀려드는 업무량을 버티지 못하고 의료 인력이 이탈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기존의 전문의들이 힘들게 배운 진료과목을 변경하는 일도 잦아졌다. 흉부외과의 80%, 외과의 50%가 전공과 다른 진료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환자를 위한 소신 진료는 드라마에서만 존재하게 됐다. 실제 현장에서는 소송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 방어 진료’만이 존재하게 됐다.
의료인도 사람이다
의료 체계가 더 무너지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즉 정책입안자들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의료인이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치료 과정 중 의도치 않게 나쁜 결과가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 의료과실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대한의사협회에서는 2월 의사 99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국가가 한정적인 자원으로 필수의료를 지원하기 위해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는 ‘의료수가 정상화’라고 답한 사람의 비율이 41.2%로 가장 높았다. ‘의료사고로 발생하는 민·형사적 처벌 부담 완화’(28.8%)가 그 뒤를 이었다. 금전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해결이 어렵고 보험료 인상에는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한 것은 지나친 처벌 부담 개선이다.
독일에서는 의료인 형사재판 및 형사책임은 검찰 기소 단계에서 조건부 기소유예 등을 통해 형사처분을 자제한다. 의료과실이 인정돼도 대부분 조건부 기소유예나 벌금형으로 구형한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의료과실 같은 전문 영역을 특수 전담부에 맡긴다. 의료인 면허관리의 독립성 및 의사의 의료행위에 대한 신뢰 문화로부터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참고한 대한의사협회는 ‘필수의료 사고처리 특례법’을 준비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해 고시하는 중증·희귀·난치질환자에 대한 진료·처방·투약 또는 외과적 수술을 제공받은 환자에게 사상 의료사고 발생 시 필수의료종사자에 대한 공소권이 없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진료 기록의 위·변조나 중대한 사실을 은닉한 경우, 무면허 의료행위 등 경우는 특례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 즉 모든 의료사고의 면책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적극 알릴 필요가 있다. 불가피한 의료사고가 났을 때 국가가 책임 소재 판단을 좀 더 신중히 해달라는 것이다. 영미법계 국가들처럼 전문 지식이 필요한 의료 소송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전담부서 설치도 고려해봐야 한다.
한국도 미국처럼 의료보험의 보장 범위를 대폭 줄이거나, 반대로 영국처럼 국가가 의료서비스 전반을 제공하는 식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 우리나라 의료는 가성비가 좋다. 다른 나라는 문제가 없을까. 미국은 의료 비용 문제, 영국은 긴 대기 시간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막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유행이 시작되자 다른 나라들 모두 평균수명이 감소하는데 우리나라만 평균수명이 늘지 않았나.
의료인을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기소하거나 처벌하는 일만 막아도 의료체계 붕괴를 늦출 수 있다. 일단 당면한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수가 문제 등 의료체계 변경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 영화 ‘신세계’처럼 합의가 깨져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아야 한다.
박은식 내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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