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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야기

[朝鮮칼럼 The Column] 소주성·탈원전 교수님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입력 2022.09.23 03:10
 

30% 초반대의 저조한 지지율 속에 윤석열 정부가 등장한 지 넉 달이 지났다. 하지만 막장 드라마 같은 정치권의 권력 싸움 탓에 새로운 정권의 출범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국민이 많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정부와 확실히 차별화된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소득 주도 성장과 탈원전 정책의 폐기가 대표적이다. 또한 기존 부동산 정책의 대폭 수정도 예고했다. 국정 개혁도 필요하고 적폐 청산도 중요하지만 이런 것들이야말로 정권 교체의 보다 실속 있는 보람이다.

 

그렇다면 지난 문재인 정권의 간판급 정책들을 구상하고 설계하고 주도했던 핵심 관계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때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장면은 20대 대통령 선거 직후 ‘소주성’의 경우다. 지난 3월 말, 대통령직속 소득주도성장 특별위원회는 소주성 5년을 평가하는 책자를 출간하면서 토론회를 개최했다. 소주성 찬미 일색이었던 그날, 텅 빈 객석 앞에서 단상의 참석자들은 기념사진을 찍으며 ‘소주성 파이팅’을 외쳤다. 소주성 자체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만큼은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공개 활동은 없었다.

 

탈원전의 경우에는 그런 식의 ‘고별 공연’조차 없었다. 원전 사업의 경제성 조작, 최악의 한전 영업 손실, 전국적인 태양광 사업 비리, 원전의 친환경 명예 회복, 일본 및 유럽 국가들의 잇따른 원전 재개 앞에 탈원전주의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4년 동안 쉬었던 한국공학한림원 주최 ‘에너지포럼’이 얼마 전 열렸는데, 그런 데라도 참석하여 평소 탈원전 소신을 밝혔다는 말은 끝내 듣지 못했다. 대통령 소속 ‘2050 탄소중립위원회’ 전(前) 민간위원장은 에너지 정책과 관련하여 “차기 정부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며 발을 뺐다.

 

한편, 부동산 정책의 경우는 지난 정권 말기,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문 전 대통령이 “자신 있다고 장담하고 싶다”고 호언했던 부동산 정책이 되려 정권 재창출의 최대 걸림돌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여당 대선 후보마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할 정도였다. 이때에도 정작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핵심 이론가들은 대부분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다. 윤석열 정부가 부동산 정책 기조를 새로 짜는 현재도 진보 성향의 부동산 전문가들은 가타부타 말수가 적다.

 

한국 정치에 있어서 정책 수명은 유난히 짧고 정책 반전은 유달리 잦다. 5년 단임 대통령제에다가 진영 논리가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정치인들에게 정책이란 선거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때가 많아졌다. 고도의 정책 전문성으로 무장한 공무원 또한 점점 더 찾기 어려워졌다. 관료들에게 영혼 가출은 시나브로 처세술이 되었다. 출세주의와 보신주의가 판치는 작금의 국책 연구원 분위기로는 엘리트 정책통(政策通)이 나오기도 힘들다. ‘권력 해바라기’에 가까운 우리나라 시민운동 단체가 독자적인 싱크 탱크로 거듭날 전망도 현재로서는 높지 않다.

 

정부 정책의 합리성과 생산성, 그리고 안정성 확보를 위해 그래도 나름의 역할이 기대되는 또 다른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지식인 교수 사회다. 학자의 존재 이유는 사실의 바탕 위에서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를 학계의 공인 무대에서 검증하고 토론하는 데 있다. 이념이 다르면 다른 대로, 가치가 다르면 다른 대로 각자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해 옳고 그름을 다투는 학문의 세계는 근대 지식 국가의 든든한 동반자가 아닐 수 없다. 지식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측면에서 대학교수들의 정치 참여를 폴리페서라 부르며 무조건 매도할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폴리페서인가 하는 점이다.

정권이 바뀜에 따라 소주성과 탈원전, 반시장적 부동산 정책이 줄줄이 버림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 정책을 선도하거나 지원해 왔던 지난 정권의 참여 지식인들이 말을 아끼거나 뒤로 물러서는 것은 과연 순리이고 상책일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시류에 영합하는 ‘권력 부나비’였음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지식인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언제, 어디서나 할 말은 한다는 뜻이다. 무릇 국민에게 좋은 정책이란 이런 과정에서 단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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