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잘 나간다는 용형( 용감한 형제) 은 그냥 사춘기 시절 건달이 아니라 진정한 조폭세계의 2인자 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생활을 정리하고 음악을 했다한다. 화성학 등 음악의 기본도 모르면서 그냥 느껴지는 감각을 바탕으로 악보를 만들어 갔다는데 그런 과정을 거친 히트곡이 수없이 많단다. 정말 이런것이 천재일거다. 이해가 안간다.
나는 독서량이 부족한 중년이지만 이렇게 글을 감칠나게 쓸 수 있을까? 너무니 멋진 수필이다. 필력이 참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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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가 돌 무렵이었을 때,
그는 아주 밝고 영리했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고,
그림책을 좋아하는 아주 순한 아이.
두 돌이 되기까지,
그는 아주 어려운 아이였다.
말을 하지 않았고, 화를 많이 냈으며,
낯선 곳을 질색했다.
아이가 세 돌이 되었을 때,
나는 내 아들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기준에 간신히 못 미쳐 잠시 유보 된
몇 개의 추정 진단명이 테이블 위로 오갔고,
‘.....예후는 아직 확실히 말할 수 없어요.
중요한 건 진단명의 확정이 아니라,
지금 당장 적절한 교육을 시작하고
최대한 빨리 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겁니다.’
자신만만한 소아과 의사로 살아 온 내 발 앞에
파편처럼 우수수 흩어지던 익숙하고도 낯선 말들.
검사를 받고, 상담을 받고, 치료실을 알아보며
우리 가족은 2주만에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다.
급히 얻은 집이라 적지 않은 월세를 내야 했지만
공원과 치료실이 가깝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 때 나는 서울에서 시외버스로 1시간 반 걸리는 곳의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딸은 갓 돌을 지났으며,
남편은 남도의 어느 시골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즉,
당시의 생활비와, 월세와, 대출이자와,
아이의 치료비는 오롯이 내가 다 벌어야 했는데
그러자면 소아과가 발에 치이는
서울에서 새로운 직장을 얻는 것보다
나의 동선을 포기하고
기존의 직장에서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시간도, 돈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의 절반은
서울에서 시외버스로 출퇴근을 하고,
나머지 절반은 아이의 치료실을 따라다니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10월에 이사했는데, 새벽 6시쯤 집을 나서면
뿌연 여명 속으로 안개가 늘 자욱했다.
날은 곧 추워졌고, 귀갓길은 스산했으며
빈 속에 마신 캔맥주 몇 모금은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리를 더 빙빙 돌게 했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
나는 두 사이즈 큰 패딩 점퍼를 구입해
외투를 두 겹으로 입고 다녔다.
버스가 멈추는 곳은 큰 대로변,
택시를 잡기도 애매한 곳이라
집까지는 20분 정도를 걸어와야 했는데
그 길에 눈발마저 날릴 때면
늙은 곰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버스정류장에 앉아
멀리 달리는 차들의 전조등만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터미널 대합실에서 대충 때운 삼각김밥과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안주 없이 마시는 캔맥주,
그리고 스트리밍 앱에서 흘러나오는 오래 된 노래들.
겨울이 다 지나고 있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고
이 시간은 나에게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봄이 돌아오고,
둘째가 오빠를 앞서 본격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엄마, 딸기딸기, 이야이야오.
그 때 너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네 인생에 무슨 일이 닥치건,
내가 다 막아줄테다,
그러니, 내가 살아야 한다.
얼음을 깬 동백 꽃잎처럼 찬란하던 너의 웃음이
나를 매일 다시 살려내던 봄.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먼지와도 같이 사소한 일로
큰 아이가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식탁에서 딸아이가 달아나고
나는 큰아이를 잡으려 일어났는데
큰아이가 홧김에 넘어뜨린 식탁 의자가
내 발 위로 쓰러졌다.
쿵.
등줄기를 타고 전류가 오르며
심장이 발바닥으로 떨어진 듯 발가락이 쿵쾅쿵쾅 울렸다.
아, 부러졌겠구나.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새로운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이것이 가장의 무게로구나.’
발을 다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 중요한 것은 아이의 거친 행동을 막는 것이었고,
다음 달의 생활비와, 월세와, 치료비를 감당하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나는 다친 티 내지 않고
똑같은 일을 똑같이 해야만 했고,
그렇기에 발가락 따위를 다쳤다고 병원에 갈 수는 없었다.
병원에 가면, 엑스레이를 찍을 것이고,
내 발은 고정치료가 필요해 질 것이며,
그럼 나는 어떤 식으로든 직장에 폐를 끼치게 되고,
결국 일을 지금처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나는 정말 아프지 않았다.
압박붕대를 찾아 적당히 고정하고 양말을 신었다.
신발장 구석 낡아 헐거워진 운동화를 꺼내
끈을 더 느슨하게 풀었다.
버스를 탔고,
일을 했고,
집으로 돌아왔다.
발은 닷새쯤 더 붓고 멍이 들다가
일주일이 지나자 그럭저럭 힘을 싣고도 걸을 만 했다.
보름 쯤 지났을까,
언제까지 붕대를 감고 다녀야 할까 싶어
아이의 치료실 아랫층에 있던 정형외과에 갔다.
뼛조각이 부러져 나갔는데, 안 아팠어요?
아, 네, 뭐..
아프지 않다면, 이제는 괜찮을거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괜찮았다.
나는 그 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가장 됨’이 주는 삶의 무게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군의관으로 마땅히 해야 할 병역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자신이 돈을 더 넉넉히 벌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거듭 내게 미안해 하던 남편의 마음이,
내가 한 번씩 한숨 쉬며
혼자서 ‘그만 하고 싶다...’ 내뱉는 푸념조차
어쩌면 그에게는
스스로 허락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안타까움이
남편의 자리를, 아버지의 자리를,
가장의 자리를 한 꺼풀이나마 이해하게 했다.
그래서 그 후로 나는 가장의 권위에 저항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일을 하건,
당신이 더 무겁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어떤 일을 겪건,
당신은 함께 겪는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남편은 제대를 했고,
제대에 맞추어 우리에게는 셋째가 태어났다.
큰 아이도 크고 작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수월하게 말을 하고 놀이학교에 잘 적응하며
얼핏 보통의 아이들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나는 셋째 출산과 기존 병원의 이전 시기에 맞추어
일을 잠시 쉬기로 했고
남편은 제대 후 바로 개인병원에 취직하여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전통적인 역할을
각자 8:2 정도로 적당히 나누어 가진 채
일을 하고,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았고
그러는 동안 서로에게 점점 빚을 져 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마음의 빚들로 살아간다.
고마움의 빚, 미안함의 빚, 배려의 빚,
서로 알아 줌의 빚, 이해함의 빚.
그렇게 차곡차곡 저축 된 감정 사이로
달콤한 애정과 가벼운 즐거움과
서로만 아는 측은함이 춤을 추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을 오늘도 빚지고, 오늘도 저축해 가는 것.
그것이
결혼.
p.s.
이제는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어요.
혹시 걱정하실까봐 ?
(사춘기 초입의 사내아이가 승질부리는 거야 뭐
다 그런 거니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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