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통칭 명동성당(明洞聖堂, 영어: Myeongdong Cathedral)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대성당이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대규모의 고딕 양식 천주교 성당이자, 한국 최초의 본당(사제가 상주하며 사목하는 성당)이다. 1977년 11월 22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조선 천주교의 시작
조선인 최초로 북경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 1784년 봄에 귀국하여 서울 명례방(현 명동)에 있는 통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모임인 '명례방공동체'를 결성하였다. 이승훈, 정약용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명례방 사건'이 발생하여 김범우가 유배된후 1787년에 사망하면서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뿌린 씨앗은 밀알이 되어 김범우가 사망한지 100년이 흐른 1887년에 김범우의 집이 있던 일대의 대지를 매입 완료한후 명동성당 건립을 위한 첫삽을 뜨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대지매입과 정지작업
1882년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가 '김가밀로'라는 한국인 전교회장 명의로 대지매입 작업을 시작하였다. 매입과 건축에 따른 재정지원은 파리선교회가 하였다.[15] 현재의 명동성당 자리는 침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의 저택이 있었는데 바깥채만도 60칸이 넘는 넓은 집이어서 처음에는 한옥 그대로 교회로 이용했다. 블랑 주교는 이 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고종 24)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소유권 분쟁과 금교령
조선 왕실은 천주교 측에 작업 중지와 토지권의 포기를 요구하지만 천주교 측은 공사를 강행했다.성당의 건설은 조선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1888년 4월 조선 정부는 금교령을 발표하며 천주교를 탄압했는데 이 원인이 명동성당 건립 때문이었다. 당시 고종은 왕궁보다 더 높은 자리에 훨씬 높은 건물이 올라 가는 것에 분개했다.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과 가까워 성당 건립으로 영희전의 풍수(風水)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소유권을 억류하여 공사를 지연시켰다.특히 이 저택과 부지는 평소 청백리로 소문났던 침계 윤정현을 위해 고종이 직접 하사한 집이었기에 고종의 분노는 더 컸다. 고종은 천주교 측에 당장 건축의 중단을 요구했지만 천주교 측은 고종의 요구를 거절했다.
결국 고종은 금교령을 발표해 천주교 및 개신교의 전도 활동을 막았다. 4월 28일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식이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3국 공사에게 기독교 전교를 금하라는 조회문을 통보한 것이다. 명동성당 건설로 인한 조선 정부의 금교령 발표로 천주교 뿐만 아니라 개신교 선교사들까지 선교활동에 발목이 묶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성당 건설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성당 건축과 완공
소유권 분쟁이 해결된후 저택을 허문 뒤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하고 공사를 시작했다.초대 주임 블랑 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약현(현 중림동)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유진 코스트 신부가 1896년 사망한 뒤 프와넬 신부가 남은 공사를 마무리했다. 1898년 5월 29일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이 당시의 이름은 종현성당(鐘峴聖堂)이었다. 종현은 명동 성당이 세워진 장소를 말한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군 양호가 이곳(당시 북달재, 북고개)에 진을 치고 남대문에 있는 종을 가져다 달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24년에는 파이프오르간이 수입되어 처음으로 성당 내에 설치되었다. 다만 이 당시의 파이프오르간은 한국 전쟁 당시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1945년에는 이름을 명동성당으로 바꾸었다. 19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에 관련된 수배자나 시위대가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어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인식되기도 하였다.2009년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할 당시에는 교황장으로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조문 인파로 긴 행렬을 보였다.
(출처 ; 위키트리)
1936년 25개 병상 규모의 2층 목조건물로 문을 연 가톨릭의료원은 그 후 3년 뒤 명동 성모병원으로 문을 엽니다. 하루 유동인구 150만 명에 이르는 번화가 명동 길과 삼일로가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가톨릭회관입니다.
서울중앙우체국(서울中央郵遞局)은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70에 위치한 우체국이다. 총괄국장은 3급공무원 부이사관에 보한다. 1884년 11월 18일 설치된 우정총국을 모태로 하고 있으며,
- 1884년 12월 6일: 갑신정변으로 업무 중단
- 1895년 7월 22일: 한성우체사(종로구 세종로 위치)설치로 업무 재개
현재의 건물은 1905년 7월 1일 경성우편국(京城郵便局)으로 명칭이 바뀌어 이전하였다. 1939년 10월 1일에는 경성중앙우편국(京城中央郵便局)으로, 1949년 8월 13일에는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건물 이름은 포스트타워(Post Tower)이다. 서울 우체국 타워라고 불리기도 한다. ( 출처 ; 위키트리)
2021.12 어느 성탄 전날
명동의 역사여행
https://www.youtube.com/watch?v=Q9Z3Nf1O9vE&list=UUPXBaNpDNZp5JU16QXYhtWQ&index=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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