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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용 기록집

<고민할 필요가 없다> 펌

 
40도의 고열과 함께 경련을 하는 2살짜리 아이가 응급실로 왔다. 의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열과 경련을 일으키는 원인 감별을 하면서, 동시에 당장 열과 경련을 멈추도록 치료하면 된다.
일단 수액부터 연결한다. 다음은 두 살이면, 대략 12~13kg. 주사는 50kg 기준이므로, 12/50이므로 해열제(주로 디크놀) 1/4앰플과 항경련제(디아제팜) 1/4앰플을 줘서 열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경련을 멈추도록 한다.
여기까지는 가정의학과 의사인 내가 알 정도니까 응급의학과 의사가 모를 리가 없다. 그다음부터가 고민이다. 열과 경련을 일으킨 원인을 찾아 치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열성 경련이면, 다행이다.
둘째, 뇌염이나 뇌수막염 같은 중추신경계 감염이라면, 뇌척수액 검사를 해야 한다. 하라면 할 수도 있지만, 혹시나 여러 번 찌르거나 하면, 소아과가 아니라서 보호자가 뭐라할 수 있다. 소아과 선생님이 필요하다. 그리고 입원 치료도 해야 한다. 어차피 소아과 전문의가 있어야 한다.
셋째, 대사성 질환, 예를 들어 저혈당증, 저나트륨혈증 같은 전해질 불균형이나 선천적인 대사 이상도 경련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전해질 불균형 등은 당장 조절은 할 수 있지만, 선천적인 대사 이상 감별은 역시 소아과 전문의가 필요하다.
넷째, 뇌전증(간질)도 있다. 당장은 경련을 멈추게 하는 것이 목표고, 소아과 전문의 그 중에서도 신경 파트라는 세부 전문의가 필요하다.

 

다섯째, 외상에 의한 뇌손상이나 뇌출혈도 경련을 일으킬 수 있다. CT를 찍어서 확인할 수도 있지만, 외상에 의한 뇌손상이 있으면 신경외과 전문의가 필요하다.
그 외에도 독성 물질 노출, 약물 중독, 기타 다양한 신경학적 장애가 원인이다.
당장 해야하는 조치는 해열제와 항경련제를 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응급실 의사라면 모두 알고 있고 또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확률적으로 가장 흔한 첫 번째 열성 경련뿐이다. 나머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경우에는 일단 소아과 전문의, 그중에서도 신경과 세부 전문의가 필요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의학 문제고, 다음부터 고려해야할 것은 법적 문제다.
가장 기본적으로 온몸을 떠는 2세 아이에게 수액을 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수액을 못 놓아서 주사를 줄 수 없거나, 시간이 지체되어 치료가 늦어지고 결과가 나빴다면 법원은 나에게 십 수억의 판결을 때릴 것이다.
둘째, 단순 열성 경련이면 좋으련만 다른 문제가 있으면 소아과 전문의에게 보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병원에는 소아과 전문의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병원에 전원을 보내야 하는데, 어차피 다른 병원도 안 받아줄 것이다. 내가 해줄 것은 없는 상태, 더 정확히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진료가 필요한 상태에서 전원이 늦어져 아이가 문제가 생기면, 그대로 아이를 진료한 내가 독박을 쓰게 된다.
그러므로 의사로서 나의 최선은 처음부터 열이 나며 경련을 하는 2세 아이를 “소아과 의사”가 없어 볼 수가 없다고 119에 통보하는 것이다. 소아과의 부재와 전원의 어려움, 그리고 막대한 법적 위험 때문이다.
그 결과 열이 나며 경련을 하는 2세 아이는 11곳의 병원에서 거절당했고, 한 시간 10분이 지나서 한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서야 경련을 멈췄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도 의식이 없는 상태다. 경련이 한 시간 넘게 지속된 것으로 봐서 단순 열성 경련은 아니었을 것이다. 경련의 원인과는 별도로 경련 그 자체가 몸에 어마어마한 해를 끼치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조치인 항경련제만이라도 투여했다면, 후유증을 어느 정도는 줄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 가능성을 놓쳤다.
법적 위험이 의사로 하여금 몸을 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응급실뿐 아니라 외래에서 “잘못되면 당신이 책임지실거에요?”라고 따지고 들면, 의사는 조용히 진료를 포기하고, 즉시 전원 의뢰서를 쓴다.)
법적 위험 때문에, 소아과 전문의는 많으나 모두 위험이 덜한 1차 진료만 할뿐 대학병원이나 신생아 중환자실에 근무하는 소아과 의사가 없다.
법적 위험 때문에, 11곳의 응급실 의사는 처음부터 열이 나는 경련하는 2세 아이를 거부했다.
실제로 대구에서 17세 청년 뺑뺑이 사망 사고가 발생하자, 수용 불가를 알린 병원은 행정처분을 받았지만, 환자를 직접 본 후 다른 병원에 이송한 병원은 행정 처분과 함께 의사는 기소를 당했기 때문이다.
High risk, law return.
위험 환자를 보자, 소송이 돌아왔다.
그 결과 (의사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환자가 뺑뺑이를 돈다.
의사가 없는 게 아니다. 위험이 너무 높고, 많을 뿐이다.
이대 목동 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으로 당시 암 치료를 받으며 진료중이던 신생아 중환자실 교수가 증거 인멸 위험으로 법정 구속되었다. 결국 무죄로 풀려났지만, 그 사건 이후 소아과 지원은 폭망했다.
소아과 의사를 사라지게 만들고, 응급실 뺑뺑이를 만든 건 의사의 사명감이나 수 부족이 아니라, 판사의 가혹한 판결이다. 거기다 초원에는 시체를 뜯어먹는 하이에나들이 넘쳐 난다.
안타까운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고, 또 발생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굴 탓해야 할까? 탓을 넘어 해결책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