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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용 기록집

공녀 이야기

조선이 중국에 바친 것들중에 각종 특산물보다 곤혹스럽고 치욕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貢女였다. 明은 노비의 딸을 공녀로 보내도 됐다.明은 데려간 貢女들을 어차피 노비로 소용됐기 때문이다.
(사실 살도리로 굶는 가난한 양반집의 노비들은 明으로 끌려가면 굶지는 아니하니 明으로가는것을 그리 슬퍼하지않았다 부모와 헤어지는 것을 슬퍼 할 뿐)
 
 
그러나 淸은 노비용의 貢女를 필요로하지 않았다. 지들이 부려야 할 노비는 짐승같은 漢族여인들이 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淸은 근본이 무식한 산적류의 집단이었기에 고급진 상류문화에 열등감이 있었다. 그래서 교양있는 조선의 상류층 처녀들을 문화적 생활의 상대겸 性의 상대로서 필요했기에 그런 수준높은 양가의 여인을 요구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양가의 딸을 요구했고 양가의 딸이래도 그중 3~5할은 꼭 上級양반가의 문자를 알고 예절교육을 받은 규수들을 요구했다. 그 양반가의 규수들은 황족과 귀족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淸 초기에 양반가 처녀들의 부모들이 겪어야하는 슬픔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어느 아비는
딸이 끌려가는 길을 압록강까지 눈물로 따라갔다가 딸과 이별한후 피눈물로 돌아 온 사연을 일기에 남겼겠는가
조선조 수백년간그렇게 매년 기백명의 단장이 애는 부모들이 있었다.
해서 양반들이 생각해 낸 꾀가 노비의 딸이나 상놈의 딸중 용모가 좋은 아이를 5~6세에 양녀로 입양하여 십수년간 양반의 딸로 글자와 예의범절을 교육하며 양육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장성했을 때 마침 왕이 上級의 공녀를 찾느라 전전긍긍하면 "전하의 심려를 덜어준다"면서... 자기 딸이라며 공녀로 내놓는것이다. 왕도 눈치챘겠지만 그래도 여아를10수년동안 키운 신하의 공력을 치하하고 고마워 할 뿐 모른척했다. 참 기가막힐 일이다.
그렇게 끌려간 貢女중 용모가 뛰어나거나 재조가 출중한 여인이 황실 일원의 소실이 되는 일이 있었다. 貢女로 끌려가 졸지에 淸의 귀족반열에 오른 것이다
 
 
실제 한 여인은 황제 6촌의 소실로 있다가 정실이 죽자 정실로 승격하여 淸 조정의 정치를 좌지우지한 일도 있었다. 그녀는 조선의 양부모를 잊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공대하니 조선조정도 그 양부를 특별히 우대했다.
간혹 양부나 양오라비가 사신 일행으로 淸에가면 조선의 사신일행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배풀기도했다.(언첸가 양오라비가 사신일행으로 갔을 때 그녀가 초대하여 장중하고 거대한 연극을 보여준 이야기는 몇년전 이곳에 썼다.당시의 淸은 지구상 최대의 부자 나라였다 그 사치와 화려함은 상상을 絶한다)
그런 양녀를 隱秀 假閨 影閨 등 열 몇개의 명칭으로 불렸는데 淸이 그 명칭을 적시하여 그런 공녀는 보내지 말라고 요구하여 그 때마다 명칭을 바꿨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이 500년간 중국에게 받은 멸시와 수탈과 핍박을 사실그대로 알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지금이라도 중국에 천만번 분기탱천해야한다.
그래서 우리가 일제에 35년간 탄압 받았다며 팔딱팔딱거리는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