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사형집행인
샤를-앙리 상송
Charles-Henri Sanson
길로틴이 프랑스의 정식 사형도구로 채택된 것은 1792년.
사형제도가 폐지된 1981년까지 길로틴에 의한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직업으로서의 집행인>
다른 나라와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사형집행인의 실명을 공개하고 횟수까지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더구나 사형 집행인이라는 직업을 후손들에게 가업으로 잇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가령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길로틴에 의한 사형 (1977)을 집행한 집행관은 마르셀 쉬발리에 (Marcel Chevalier) 라는 인물이었다. 처형장에는 마르셀 쉬발리에의 아들 에릭(Eric)도 참관하였는데 그는 아버지를 이어 사형 집행인이 되기위해 '현장 실습'을 온 참이었다.
그러나 가업을 이으려던 에릭 쉬발리에는 꿈을 접어야 했다.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사형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1981)
아뭏든 이를 계기로 튀니지계인 흉악범 Hamid Djandoubi의 처형을 끝으로 프랑스는 물론 서구사회에서 참수형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천시받던 직업>
그렇다면 프랑스에서는 사형집행인이 자랑스러운 직업이라도 되었다는 뜻일까?
결론적으로 그렇지 않다.
프랑스의 루이 16세 치세기에 샤를-앙리 상송 (Charles-Henri Sanson) 이라는 집행인이 있었다.
그는 몇대째 사형집행인으로서의 직업을 가업으로 이어 왔었다. 사형집행인의 집은 민가와 멀찍히 떨어져 있어야 하고 혼인도 같은 직업을 가진 집안하고만 할 수있었다. 국가에서 녹봉을 넉넉하게 지불하여 살림은 윤택했으나 극히 천시받는 직업이었다고 한다.
샹송이 집행하는 기존의 처형방식은 아직 길로틴이 등장하기 이전이어서 날을 세운 커다란 검을 휘둘러 죄인의 목을 단번에 치는 방식이었다.
<기막힌 악연들>
집행인이 사형수와 인연이 있는 경우, 집행인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수 밖에 없다.
위에 언급한 샹송의 경우 그의 자녀 결혼식에 우연히 참석하여 머물고 갔던 겸손하고 자상한 귀족 사내가 십수년 후 국사범으로 처형받게 되자 처형장에서 조우하는 악연을 겪게 된다.
샹송은 자신에게 친절했던 백작의 목을 쳐야한다는 중압감에 고열로 신음하게 된다. 그는 아들에게 처형을 맡기지만, 수련이 부족한 아들의 칼날이 백작의 머리카락에 미끌어지는 바람에 백작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만다.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작. 결국 샹송은 아들로부터 칼을 넘겨받아 단번에 백작의 목을 두 동강낸다.
백작처럼 평소 백성들로 부터 존경받던 인물이 처형을 당하는 경우, 처형인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고 한다.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단칼에 처형 하지 못하는 경우, 성난 군중들은 집행인을 끌어내려 린치를 가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국왕을 처형하라>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공안위원회로부터 기별을 받은 샹송은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투옥된 뒤 폐위되었던 국왕 루이 16세를 처형하라는 지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서슬퍼런 공포정치 (the Reign of Terror: 1793-1794) 의 기간이였지만 불과 얼마전까지 프랑스의 국부였던 국왕을 처형하고 자신과 가족의 안위가 무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샹송이 처형을 거부하고 몸을 감추자 공안위원회는 그가 반혁명죄를 저질렀다며, 그의 집에 혁명경찰을 보낸다. 샹송이 뒤늦게 처형에 임하겠다는 뜻을 전했을때, 혁명 경찰은 이미 샹송의 아내를 사살한 뒤였던 것이다.
샹송은 이후 혁명정부로부터 반혁명분자로 분류된 3000명을 처형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때부터는 검을 사용하지 않고 악명높은 길로틴을 사용)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도록 지시한 로베스피에르 (Maximillien Robespierre)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에 불타있던 그에게 어느날 상상도 못했던 정변이 일어난다. 국민공회에서 끊임없이 숙청을 주장하던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그의 일파들 (생쥐스트, 쿠통, 오귀스탱, 외 18인)이 결국 국민공회 의원들로부터 역공을 받고 숙청당하는 날이 온 것이다.
이로써 샹송은 프랑스대혁명으로 왕권을 잃은 루이 16세를 포함,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로베스피에르 일파까지 모두 처형하는 악연을 맡게 된것이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한 셈이었으나, 샹송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도와 처형을 집행하던 장자 가브리엘이 미끄러운 처형대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이다. (1790)
장자에게 가업을 이으려던 샤를-앙리 샹송은 막내아들 앙리 (Henri)를 후계로 지명하고 1806년 사망했다.
(2020)
<후기>
1) 집행인을 맡은 앙리는 무려 47년간 그 직을 이어간다. 그는 마리 앙토와네트 및 검찰총장 Fouquier Tinville 등을 사형집행한것으로 유명하다.
2)샤를-앙리 샹송가문의 사형집행인 가업은 1847년까지 6대에 걸쳐 내려갔다고 한다.
3)한 외과의사의 실험에 의하면 몸에서 분리된 머리는 약 30초간 의사가 이름을 크게 부르자 눈을 크게 뜨는 등 반응하였다고 한다. 이는 단두대에 의한 처형이 고통없는 죽음을 맞게하자는 원래의 뜻과 다소 다름을 알수 있다.
그러나 머리와 분리된 몸통은 일반의 상상과는 달리 뇌로부터의 지령이 끊긴 상태여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설명)
1. Charles-Henri Sanson의 캐리커쳐
2.단두대 (Guillotine)의 모습
3.단두대위에 올라선 루이 16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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