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 축에 속하는데, 오래전 『백범일지』를 처음 읽으며 받은 충격 때문인 것 같다. 감옥살이의 고통스러움을 한껏 토로하며 그는 적는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들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난다.”
오늘 어느 정치인이 김구처럼 말했다면 어떻게 될까. 사회도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도 변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김구의 말을 어떻게 여기든, 그의 말이 당시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건 사실이다. 그걸 인정하는 건 역사를 대하는 기본적 태도를 이룬다. 오늘 사회와 의식을 역사적 상황에 들씌우는 건 역사 해석이 아니라 각색 혹은 창작이다.
지배수법에 악용되는 ‘반일감정’
중요한 건 친일 아닌 일제부역 여부
이젠 콤플렉스 민족주의 벗고
보편적 인류애의 개인으로 설 때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를 민족의 성녀라 추켜올리거나 자발적 매춘여성이라 깎아내리는 일도 그렇다. 위안부의 가장 주요한 정체성은 빈곤과 여성이다. 부유한 위안부도, 남성 위안부도 없다. 위안부는 ‘가난한 집 딸들’이었다. 딸을 파는 가난한 아버지들이 많았다. 김구의 말에서도 비치듯,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매를 중계하는 조선인 업자들도 많았다.
팔려가는 딸들의 역사는 일본군 위안부로 끝나지 않았다. 해방 후 미군 위안부와 전쟁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역사로 이어진다. 연구자들은 한국 정부가 미군 위안부와 한국군 위안부를 매우 적극 관리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팔려가는 딸들, 여성 인신매매는 그 후로도 매춘 산업의 주요한 공급 방식이 된다.
근래 많은 시민이 나눔의집과 정의연(정의기억연대)에 분노했다. 일본군 위안부 여성을 지원하고 그들과 함께 싸운다는 명분 하에, 사익을 추구했다 볼 만한 정황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앵벌이 집단’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으니 시민의 실망과 분노가 어떤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만일 그 정황들이 사실이라 해도, 그 단체들이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왜 변질했을까.
그 주요한 조건으로 콤플렉스 민족주의를 꼽을 수 있다. 한국인들이 반일 감정을 갖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식민지 역사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민족 전체와 일본 민족 전체 사이에서 일이 아니었다. 일본 지배계급(제국주의 세력)과 조선 민중 사이에서 일이었다. 대다수 일본 민중 역시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하는 피해자였으며, 조선의 지배계급은 일본 지배계급과 공조하며 안락을 유지했다.
해방 후 한국 지배계급은 그 역사를 민족 전체의 일로 만들어낸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부수면서도 반일 정책을 고수했고, 일본 군가를 즐겨 부르던 사무라이 박정희는 일본 문화를 엄격히 금지했다. 그들은 그런 정책 덕에 한국 내의 여러 모순적 상황들을 상당 부분 덮을 수 있었다. 반일 감정은 반세기에 걸쳐 극우 독재 세력의 손쉽고 효과적인 지배 수법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했음을 내세우는 현 정권이 이어받아 죽창가를 부르고 항일을 외친다.
‘친일파’는 그런 지배 수법에 최적화한 말이다. 우리가 문제 삼을 건 일본과 친했느냐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했는가이다. 이를테면 프랑스인들이 나치 부역자를 표현하는 말은 ‘콜라보’다. ‘친독파’에 해당하는 ‘제르마노필’은 단지 독일이나 독일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일파가 아니라 ‘일제 부역자’라 고쳐 말해야 한다.
위안부 관련한 학문적 견해 때문에 정의연과 나눔의집과 갈등을 빚고 마녀사냥을 당했던 박유하 씨에 대해, 그 단체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무너지고도 지식사회의 재평가가 없다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박 씨의 재평가엔 자신들의 오류 인정이 수반되기 때문일 것이다. 논의는 사태의 구조가 아닌 개인 윤리 차원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제 윤미향이 새로운 마녀이며, 옛 마녀 박유하는 침묵으로 배제된다. 그들은 여전히 한나 아렌트에게 민족 배신자 낙인을 선사한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콤플렉스 민족주의는 한국 남성 특유의 가부장적 피해의식과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 역사 관련 발언이라도 나오면 다짜고짜 발끈하기부터 하는, 일본과 스포츠 경기를 ‘전쟁’(대일전)으로 규정하며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피해의식 말이다. ‘가장 민족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괴테의 말도 의미가 바뀐다. 괴테의 말에서 ‘세계적’이란 인류 보편성을 뜻한다. 한국에서 그 말은 다른 민족과 비교와 우열을 표현한다.
민족은 실재하며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보편성을 잃은 민족주의는 언제나 예외 없이 악용된다. 콤플렉스 민족주의가 만연할 때, 지워지는 건 민족 내의 계급 현실이다. 그리고 계급 현실의 보편성에 기반을 둔 인류애다. 평범한 한국 노동자의 친구는 동족 이재용인가, 평범한 일본 노동자인가. 콤플렉스 민족주의를 벗고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개인들로 설 때도 되었다. 오늘 한국 시민은 당연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그게 진정한 역사 청산이며 회복이다.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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