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기생하는 사람들
박선화 한신대 교수
2021.06.09 03:00 입력
5월의 광주는 문전성시였다. 여야 지도부들이 앞다퉈 국립5·18묘지를 참배했고, 진상규명 및 학살자 처벌과 관련된 공약을 언급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렸다 하고 어떤 이는 무릎도 꿇었다 한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너무 늦게 찾아왔다. 벌써 일백번이라도 사과하고 반성했어야 마땅한데 이제야 첫걸음을 뗐다”며 사죄했다 한다. 각자의 진심을 함부로 가늠하거나 폄훼할 수는 없다. 바쁜 일상에 기념일에라도 내려가 심기일전하려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은 알고 있다. 중대한 선거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박선화 한신대 교수
무고한 시민들이 군부의 만행 속에 참혹하게 죽어간 지 40년이 지났다. 정권도 수차례 바뀌었다. 그러나 학살의 수뇌부들은 여전히 대명천지를 누비고 대를 이어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 저질 논객과 정치·종교인들이 고인들을 능욕하며 막말을 쏟아내도 구형 한번 엄하게 받은 적도 없다. 광주를 떠도는 원혼과 살아남은 자들의 한은 그저 선거철에만 이용되는 정치도구가 된 지 오래다. “5·18묘역은 5월 한철 붐비고 6월부터 인적 끊기는 겨울”이란 말이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촛불민심의 도화선은 세월호에 있었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던 국민들조차 어린 생명들이 고통스럽게 스러져가는 시간 동안 도저히 밝힐 수 없는 개인사에 빠져 있었다는 국가 지도자에게 분노했고, 새로운 정권에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 진실 역시 점차 잊혀가고 남은 것은 유가족들의 설움과 상처뿐이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꾼들의 영혼 없는 애도쇼만 또다시 뉴스 화면을 가득 채울 것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을 잘 못하는 이들이 있다. 선천적 뇌구조상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게 정설화되어 가는데, 선정적 상업 드라마들과 달리 그들 모두 범죄자는 아니다. 살아가며 스스로의 취약성을 인지하고 노력하는 이들이 대다수다. 나쁜 사람들은 오히려 공감과 도덕성을 가장해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는 이들이다.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직접 범죄는 아니지만, 사회에 끼치는 악한 영향력은 직접 범죄를 능가한다. 최근 백신을 이용한 개인적 야욕을 부리다 국제적 망신을 당한 정치인처럼, 이들이 권력유지를 위해 펼치는 악어의 눈물 같은 이벤트들에 탕진되는 세금 낭비는 또 얼마나 될까.
코로나19 공포를 이용해 활개치는 해괴한 논리의 언론, 지식인과 장사꾼들, 손정민씨의 죽음에 과도한 음모론을 쏟아내는 유튜버, SNS 유저들도 마찬가지다. 5월 말 기준으로 이 사망 사건과 관련해 유튜브에서 검색된 콘텐츠만 3000개가 넘고, 이들 중 일부는 며칠 만에 수천만원을 벌기도 한다. 설익은 뇌피셜로 언어 살인을 일삼는 이들의 언행 속에 망자에 대한 진심 어린 애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 <죄 많은 소녀>가 떠오른다. 이 작품으로 괴물 신인이란 타이틀을 갖게 된 배우 전여빈의 첫 주연 데뷔작으로 알고 있다. 고등학생 영희는 반 친구 경민이 자살한 날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온갖 의혹의 시선과 수모를 겪는다. 친구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다 수시로 찾아오는 경민 부모의 압박도 고통스러운데, 매일 함께하는 교사와 학우들의 냉기와 폭력은 더 잔혹하다. 결국 영희 역시 억울함에 죽음을 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데, 뒤늦게 미안함을 느낀 이들이 하는 행동은 더욱 씁쓸하다. 자신의 경거망동을 반성하기보다 처음 의혹을 제기한 이들을 찾아 다시 책임을 묻고 폭력을 행하기를 반복할 뿐이라서다.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무색하다.
죽음에 대한 예의만큼 살아 남은 자에 대한 배려와 조심성 또한 중요하다. 타인의 상처와 슬픔을 먹이 삼아 정서적 허기를 채우는 이들. 고통에 기생하며 사회적 신분상승 욕망의 발판으로 삼는 허위 공감, 죽음의 장사치들을 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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