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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용 기록집

[박정훈 칼럼] 정치에 올라탄 범죄, 거악(巨惡)

 

거악은 법을 겁내지 않는다
정치의 힘으로 법을 우회하고
회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입력 2023.10.07.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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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대장동·위례 사건 등의 첫 공판을 마치고 재판정을 나서고 있다./뉴스1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을 파헤친 감사원의 2020년 탈원전 감사 보고서엔 ‘대통령’이란 단어가 딱 두 차례 나온다. 문재인 정권이 감사를 막으려 방해와 협박을 서슴지 않던 시절이었다. ‘2번의 대통령’은 최재형 감사원이 정권의 압박을 버티며 새겨 넣은 최소한의 단서였지만 의미는 너무도 분명했다. 멀쩡한 원전을 멈춰 세워 수십 조 국가 손실을 끼친 탈원전 범죄의 정점에 문 대통령이 있다는 뜻이었다.

“가동 중단이 언제 결정되느냐”는 대통령의 한 마디에서 원전 폐쇄가 시작된 사실이 드러났다. 대통령 의중을 확인한 산업부가 수치 조작에 나서 결론을 ‘가동 중단’으로 둔갑시켰다. 감사원 감사를 토대로 윤석열 검찰이 산업부 장관과 국·과장,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무더기 기소했지만 정작 문 전 대통령은 수사 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손발 노릇을 한 공범·종범은 법의 심판을 받고 있는데 최고 수뇌는 빠진 것이었다.

이뿐 아니었다. 대통령의 30년 지기를 당선시키려 청와대가 동원된 울산 선거 개입, 국가 통계를 입맛대로 주무른 부동산·소득 데이터 조작, 국민 인권을 유린한 서해 공무원 월북 날조 등 문 정부 때 자행된 수많은 국기 문란 범죄에서 문 전 대통령은 모두 면죄부를 받았다. 청와대·국방부·국토부·통계청 공무원 등 범죄의 수족(手足)들이 줄줄이 걸려들었지만 이 모든 사건의 꼭대기에 있는 문 전 대통령은 감사원 고발에서도, 검찰 수사에서도 제외됐다.

나는 윤석열 정부의 사법 판단에 ‘노무현 트라우마’가 작용한다고 추측한다. 문 전 대통령은 여전히 거대 팬덤을 보유한 야권의 보스다. 이재명 대표만으로도 버거운 상황에서 전선을 확대하지 말자는 정무적 판단이 작용하고 있을 법하다. 정치 논리 앞에서 법적 정의가 희생된 격이다.

법 위에 군림하는 일탈한 정치 권력을 거악(巨惡)이라 한다. 이 말이 널리 알려진 계기가 1970년대 중반 일본을 뜨겁게 달군 ‘록히드 스캔들’이었다. 자민당의 최고 실력자 다나카 가쿠에이(1918~93)가 뇌물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다. 다나카는 파벌 의원들을 총동원해 정치적으로 대항했지만 도쿄 지검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당시 다나카 의혹을 추적했던 전설적 언론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를 ‘거악’으로 규정했다. 일반 범죄 차원을 넘어 사법 기능까지 방해하고 법치를 공격한다는 뜻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기소됐거나 수사받는 사건은 총 7개다. 이 중 선거법 위반을 뺀 6개가 공적 지위와 관련된 권력형 범죄 혐의다. 인허가권을 남용해 대장동·백현동·위례 사업자에게 부당 이익을 안겨주었고, 대북 사업과 성남FC에 기업 돈을 끌어댔다는 등의 혐의를 받는다. 이 사건들과 연루돼 기소된 사람만 24명이다. 이들 중 핵심 측근 3인방을 제외한 대부분은 이 대표가 결재·인지했거나 관련됐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정점에 있는 이 대표는 건재하다. 여전히 거대 야당 한복판에 진지를 치고 사법 투쟁 대신 정치전(戰)을 벌이고 있다.

이 대표 사건의 본질을 말해주는 정황 중 하나가 그의 주변에서 기이한 일이 잇따른다는 것이다. 이 대표 관련 인물 5명이 연달아 세상을 등졌다. 전직 비서실장, 성남시 개발 담당자, 법인 카드 사건 참고인 등 진상 규명의 열쇠를 쥔 인물들이었다. 록히드 스캔들 때 다나카의 운전 기사, 사건을 추적하던 기자, 뇌물 준 기업인의 통역이 몇 달 간격으로 숨진 것을 연상시킨다. 거악의 언저리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동서고금 드문 일이 아니다.

이상한 일은 꼬리 물고 있다. 전 경기 부지사는 대북 송금 대납을 이 대표에 보고했다고 진술했다가 번복했다. 그의 아내가 법정에서 “정신 차리라”고 훈계하더니 민주당 관계자들이 그를 접견한 후 돌연 입장을 바꿨다. 이 대표는 경기 지사 선거 때 허위 발언으로 당선 무효 위기에 몰렸다가 대법원에서 무죄로 뒤집혀 극적으로 살아났다. 알고 보니 무죄 선고를 주도한 대법관이 대장동 주범 김만배와 밀접한 관계였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일까.

법치 위에 있는 것이 거악이다. 일반적 범죄자는 법 앞에 꼬리 내리지만 거악은 법을 겁내지 않는다. 정치적 영향력의 힘으로 법을 우회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치’로 ‘사법’을 돌파하려는 이 대표의 도박은 일단 성공하는 듯 보인다. 개인 범죄 이슈를 정치판 최대 쟁점으로 만들었고, 구속 위기까지 피했다. 영장 담당 판사는 기각 사유에 이 대표가 ‘현직 정당 대표’라는 점을 적시했다. 법리 판단에 정치적 고려를 반영했다는 뜻이었다. 정치권에선 이 대표가 재판을 질질 끌어 2027년 대선 때까지 끌고 가려는 전략이라는 말이 나돈다. 설마 싶지만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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