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육영공원 학생으로 선발되어 영어 몰입교육을 받은 뒤
1887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함께 주미공사관 참찬관으로 갔고 주미대리공사를 지낸 인물
1896년 설립된 독립협회 회장으로 독립문 설립을 추진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던 사람
바로 이완용이다.
1926년 2월 18일 용산에서 열린 이완용의 영결식은옥인동에서 용산까지 1,000여 대의 인력거 행렬이
줄을 이었고 십리에 걸친 만장 행렬은 고종 국장 이후 가장 화려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판결을 받을 무렵 조선인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사죄하는 대죄단(待罪團)을
조직해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그를 활불(活佛)로추앙하며 장충단에 그를 기리는 사찰 박문사를 건립했다.
'황국신민서사'를 지은 사람도 조선인이었고,
해방이 되자 이승만은 친일재벌 장진영의 돈암장에,
김구는 금광재벌 최창학의 경교장에,
박헌영은 함열 갑부 김해균의 혜화장에,
김규식은 친일재벌 민규식의 삼청장에 살았다.
맹자는 "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 나라 스스로 멸망할 짓을 한 연후에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멸망시킨다 (國必自伐然後人伐之)"고 했다.
1906년 조선 황태자 결혼비용에 125만엔을 썼는데 당시 조선 육군 1년 유지비가 1,215만엔이었고,
일본 황태자(히로히토)의 결혼비용은 35만엔 이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시일야방성대곡' 으로 유명한 황성신문은 1906년 2월 복간된 후
일본의 보호국 체제를 인정하고 일본의 보호 아래 정부를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10년 일진회는 14만 715명의 회원과 100개 하부조직을 갖고 있었고 1906년 분열 이전 세력이
절정일 때는 100만 회원이라 자칭했다.
손병희도 초기에는 애국적 동학당의 지지자였지만중기에는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친일정치가가
되었고
동학도 처음에는 반외세, 존왕, 반귀족주의 색채를 띄었으나 나중에는 친일, 반왕실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반일, 친독립으로 변하는 곡절을 겪었다 한다.
(그레고리 헨더슨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152쪽)
신복룡 교수는 3.1운동 당시 참여한 인원은 전체 인구 1,678만명 가운데 2.76%인 46만 3천명에 지나지 않았고,
1907년 정미의병 때부터 한일합방 1년 후인 1911년까지 무장투쟁에 나선 사람도 전체인구
1,312만 가운데 14만명 1.1% 밖에 되지 않았다며
한 민족이 멸망하면서 조선처럼 무기력했고 침묵한 민족이 흔치 않았다고 지적한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고 망국의 책임자인데, 망국의 원인을 몇 명의 친일파에게 추궁함으로써 망국
이라는 거대 담론을 희석해 버렸다는 그의 평가를 되새겨 보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며 '반일(反日) 팔이'에 정치적 목숨을 걸고 있는 이재명과 민주당,
그에 동조하는 적지 않은 국민들과 공존해야 하는 이 시대에
역사는 무엇이고 우리는 그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 이완용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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