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은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
2024.2.6 정부가 갑작기 2025년부터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기존의 3,058명에서 2천명 증가한 5,058명으로 증원한다는 발표를 했다. 2천명 증원은 한 해에 의과대학 입학정원의 65%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충격적인 발표였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의사수는 OECD 평균에 못미치지만 미국,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며 OECD국가 중에서 의사수가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의사증가율이 1위인 나라다.
의료계는 적어도 지난 1년 동안 정부와 28차례 만남을 가지면서 의대증원의 불합리성과 의대증원이 의료의 발전이 아닌 퇴보를 초래하는 문제점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반대해왔다.
따라서 정부의 갑작스러운 대규모 증원 발표는 의료계에 큰 충격을 가져왔으며, 특히 미래의 의료환경에 대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젊은 의사들과 의대생들이 가장 강력히 반발했다.
미래의 희망을 잃은 전공의들은 사직서를 제출했고 의대생들은 휴학계를 제출했다. 갑작스러운 의대증원 정책은 의료계에 악영향을 초래할 뿐 아니라 이공계의 공동화를 가져오고 미래의 젊은 세대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망국적 정책이기에, 나는 전공의들이 개인적 희생을 담보하고 벌이는 투쟁을 지지하고 응원했다. 그리고 전공의들을 향한 응원의 글을 SNS에 게재했다.
긴 글의 문장 속에는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의사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닌,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므로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비록 과거에 대한의사협회장직을 지냈다고 하지만, 전전전전 회장에 불과한 일개 개업의사가 자신의 SNS 계정에 올린 이 글이 언론에 집중적으로 보도됐다. 앞뒤말 모두 자르고 바로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라는 단 한 문장만 발췌되어 보도된 것이다. 이 문장을 콕 집어 보도한 이유는, 이 단문이 의사들이 이렇게 오만하다고 공격함으로써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마 후 대통령이 이 문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의료계는 국민을 이길 수 없다”
바로 이 말이다.
대통령은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대통령이 이 말을 한 순간, 정부와 의료계의 대결구도가 국민과 의료계의 대결구도로 바뀌었고 의사의 악마화가 시작되었다. 대통령의 이 발언은 실수로 나온 것이 아니다. 정부와의 대결을 국민과의 대결로 바꿈으로써 의사들에 대한 국민여론을 악화시키기 위해 나온 의도된 발언이었다. 대통령의 참모들이 워딩을 만들었을 것이다. 대통령실의 의도대로 의사들은 빠른 시간 안에 악마가 되었다. 곳곳에서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환자를 내팽개친 악마’라는 비난의 글이 쇄도했고, 의사들을 향한 비난은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그리고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대통령의 의도대로 ‘악마와 싸우는’ 대통령의 지지율은 상승했고, 정당의 지지율도 동반해서 올랐다. 지금은 피교육자 신분인 전공의와 인턴들이 피교육을 포기한 상황이고 전국의 응급실과 중환자실에는 여전히 수많은 의사들이 환자의 곁을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은 악마화되었다.
당연히 의료계는 국민을 이길 수 없다. 국민은 곧 환자고, 환자는 의사의 존재 이유인데 어떻게 의사가 어떻게 환자를 이길 수 있나. 이길 수도 없고 이길 이유도 없다. 그러나 대통령은 정부-의사간의 갈등 프레임을 국민-의사간의 갈등 프레임으로 전환하기 위해 이 워딩을 사용했다.
"의료계는 국민을 이길 수 없다"
이 워딩을 내놓은 대통령은 스스로 멋진 발언이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의사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선택한 대통령의 전략은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했던 선택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 말 한 마디에서 시작된 의사에 대한 악마화는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와 라포(rapport)를 근원적으로 허물어버렸다. 의사에 대한 환자의 존경과 신뢰는 의사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바로 환자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의료의 과정에 있어 최종적인 결정은 오로지 환자의 몫이다. 따라서 의사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환자는 올바른 선택을 하기 어렵다. 치료과정을 끝까지 마치기도 어렵다. 의사의 악마화에 동참한 수많은 국민들이 의사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잃게 되었고, 이것은 그들이 앞으로 겪게 될 치료과정에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국민과 의사의 대결구도로 몰고 간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
둘째, 그 발언으로 인해 졸지에 국민으로부터 악마로 불리게 된 의사들은 사명감과 자존감, 희망을 모두 잃었다. 이것은 세대와 무관하게 모든 의사들에게 해당되는 일이고 크나큰 상실과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필수의료분야의 의사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희생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는 마음은 사명감에서 출발한다. 사명감을 잃은 의사들은 더 이상 개인의 삶을 희생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사명감으로 지켜왔던 환자의 곁을 더 이상 같은 마음으로 지키지 않을 것이다.
셋째, 이 발언으로 비이성적인 행정이 시작되었다. 의사들의 저항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막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는데 대통령이 나서서 의사들의 저항이 국민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내자 정부의 실무자들은 그들이 전체 국민을 대표하여 의사들과 싸운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이고, 각종 불법적인 무리한 행정을 낳게했고 대통령의 발언으로 인해 이것들에 대한 합리성을 그들 스스로 부여한 것이다. 간호사와 약사, 한의사들의 업무범위 조정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모두 의료법의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이며 행정부의 판단은 초법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대통령의 잘못된 발언이 잘못된 지침으로 사용된 것이다.
대통령이 앞장선 의대증원 계획이 가져올 파장과 비극은 이제 고작 시작점에 와있다.
정치적 목적이 있는 대통령은 타협의 의지가 전혀 없고, 미래의 희망을 잃은 의사들은 타협의 이유가 없는 상황이다.
대통령 한 사람의 상황판단에 대한 오해와 정치적 뚝심이 국민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데, 국민의 비난의 손가락질은 여전히 대통령과 정부를 향하지 않고 의사들을 향해 있다. 정부가 씌워놓은 ‘의사의 악마화’ 프레임 때문이다.
그런데 손가락의 방향이 언제까지 의사들만을 향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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