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송준길 등 대학자들이 연이어 배출되었지만 당파싸움은 더욱 심해져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도 불안해졌다.
19대 숙종은 국왕이 정치무대의 중심에 서서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조절하기 위한 탕평책을 펴는 한편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였다.
20대 경종 ( 장희빈 아들)
21대 영조 때에도 탕평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폐단을 완화하는 한편 민생안정과 산업진흥을 위한 개혁정책을 시행하였다. 영조는 속대전 등을 편찬해 법치체제를 재정비함과 동시에 농업정책과 수취제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균역법을 시행하고 청계천을 준설하였으며, 사치풍조를 금지하는 여러 조치를 내리는 등 재위 기간 동안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22대 정조(사도세자 아들)는 규장각을 통해 왕권을 뒷받침할 인재를 육성하는 한편 숙종과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 받아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는100회 이상의 궁성 밖 행차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펴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중ㆍ하급 관리 중에서도 유능한 인사를 직접 선발하여 국정운영을 맡겼다.
그러나 정조 사후 60여 년에 걸쳐 왕의 외척 세력이 권력을 행사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면서 각종 비리와 조세수탈이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세도정치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급격히 늘어나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세력의 문호개방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한편 외국과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확고히 하였다.
23~25대 있으나 없으나 왕.
26대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친정하게 되면서 개항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였다. 청과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세력다툼 속에서 고종은 일련의 개화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위정척사파의 반대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을 겪으며 조선의 국운은
급격히 쇠약해져갔다. 1905년 을사조약에 체결되면서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7년 즉위한 조선의 마지막 27대 왕 순종은 재위 3년 만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이하며 519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조선왕조의 종말을 맞았다.
참고 네이버. 조선왕조실록
( 이시대의 지도자들..... 국가는 지도자를 잘 만나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