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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용 기록집

폴 뉴먼 이야기


명배우의 반열에 올랐어도 유별나게 상복(賞福)이 없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오늘 스토리인 폴 뉴먼 (Paul Newman)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는 아카데미 최우수 주연상 후보만 1958년부터 여덟 번이나 선정 되었을 정도였지만 번번히 고배를 들었습니다. 1986년, 이미 환갑의 나이가 되어 또다시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상후보로 선정되자, 이제는 더이상 아카데미 시상식에 수상 후보로 가는 일은 안하겠다며 자택에서 머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각도 못했던 수상자가 됐던 겁니다. 그 영화가 바로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탐 크루즈와 공연한 'The Color of Money'였습니다. 천재적인 당구실력을 갖춘 톰 크루즈를 발탁해 당구 토너먼트를 석권하여 큰 돈을 거머쥐려는 노회한 허슬러 (hustler 사기꾼 건달)역 이었습니다.

아뭏든 그가 상을 받지 못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작에는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Cat on A Hot Tin Roof, 1958), '허슬러' (Hustler, 1963), 제가 개인적으로 10대 영화를 선정한다면 꼭 넣고 싶은 'Cool Hand Luke' (1967: 냉소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청년 폴 뉴먼이 고의로 범한 공공기물 파손죄로 감옥에 들어가 냉혹한 소장과 심리전을 벌인다는 플롯) 등이 있습니다.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작이 아니더라도 영화사에 길이 남은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 '스팅' (The Sting), 'Fort Apache, Bronx' (1981) 등 명화들이 수두룩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외모는 다소 냉소적이고 얄미운 개인주의 성향일 것 같이 보이는 느낌이나, 폴 뉴먼은 실지로는 셀럽으로서, 그리고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에 충실했던, 참다운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인사였습니다.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을 결정하자마자 오하이오의 대학생이었던 뉴먼은 장교가 되어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Yale대에 개설한 조종사 양성학교에서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색맹으로 밝혀지면서 조종사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군 하사관 (부사관, Petty Officer)으로서 어뢰공격기 (뇌격기: torpedo bomber)의 포술장으로 사선을 넘는 전투에 참전한 용사였습니다.

다음은 특히 제가 개인적으로 그를 존경하게된 계기였습니다.

폴 뉴먼은 1982년에  돌연 'Newman's Own' 이라는 식품회사를 차렸습니다. 그의 명성과 좋은 품질로 인해 이 회사는 일취월장하게 되었습니다. 폴 뉴먼은 이 식품회사에서 벌어들인 순수익금 전액을 각종 자선사업에 기증했는데, 2021년까지 5억7천만 달러에 달할 정도로 그 규모가 막대합니다.

폴 뉴먼은 어린이를 위한 재단과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식수 보존 사업을 위한 재단도 설립했었습니다. 그밖에도 그의 통큰 기부는 다방면에서 계속되었습니다. 그의 모교 (Kenyon College)가 야심찬 학교발전 기금 모금 계획을 세우자 무려 1천만 달러를 기부했던 것이 가장 인상 깊습니다.

어떻습니까? 연예인으로 성공하면 커다란 저택이나 빌딩들을 구입하고 TV에 나와서 이를 화려하게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세태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까?

<멋진 삶>
그는 유대인임을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배우로서의 경력외에도 카레이서로서의 경력도  수준급이어서 '24Hours of Le Mans' 대회에서는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1979)

배우로서, 카레이서로서, 사회사업가로서 그정도면 정말 원없는 삶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삶이었지만,  큰아들 스콧 (Scott Newman)을 잃은 아픈 기억도 있습니다. 스콧은 배우겸 스턴트맨으로도 유명했는데, 아버지가 주연을 맡았던 '타워링' (The Towering Inferno, 1974)에 스터트맨으로도 출연했었습니다.

두번째 부인이자 배우인 조앤 우드워드 (Joanne Woodward: 사진 1,2)와 1957년 결혼하여 50년간 해로했습니다.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 도전은 배우에서 감독으로의 변신이었습니다. 2008년 영화 'Westport Country Playhouse'의 메가폰을 잡는데는 성공했으나 급작스러운 와병으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도전하는 그의 정신세계가 돋보입니다.

그해 가을 폴 뉴먼은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83세. 사인은 폐암이었다고 합니다.

(2024) 페친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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