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기동 타격대 31명의 진술
광주의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고자 26일에 결성한 기동타격대원은 대략36여명
가방끈 긴 사람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 자칭 하층민들.
근데 그들은 왜 거의 다 중학교도 졸업못한 사람들일까?
그 당시에는 다들 그렇게 가난했나? 아니면 사회에 적응잘 못한 사람들이 많았을까?
왜 이렇게 화가날 정도로 못살았지? 왜 이런 큰일을 한 분들이 가출하거나 퇴학당한 사람들일까?
중학교 학비를 못내서 국졸 후 집안 농사일 한다고? 이렇게 많이들?
이런 사회적 약자들이 왜 도청을 마지막 까지 사수했지?
존경보다 멸시와 무관심을 받았을 사람들이 왜 광주 시민을 지킨다고 그렇게 나섰을까?
그 많은 배운사람들은 다 뭘하고?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가 감히 내게 가능할까?
정말 존경스럽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 부모는 나를 감만히 뒀을까? 내가 부모의 앞날을 망칠 용기가 있었을까?
임신7개월인 이모가 군인들 총맞아 죽는다면 나는 어떻게했을까?
귀가하다 피범벅이된 길거리 시체들을 본다면?
심약한 내가 대놓고 나서지는 못해도 뭔가는 작게라도 시도 했을것 이며 만약
아무것도 안했으면 그 죄책감으로 인생이 많이 무너졌을 듯 싶다.
돌이켜 보면 내게도 일 말의 용기는 있었다.
83년 초가을 고려대 안암동 학생회관 앞에 있는 종합관 2층에서 영어수업을 듣고있었다.
날은 선선하고 하늘은 높았으며 항상 그렇듯 데모는 TV 광고처럼 매일 일어났다.
그날은 서관 시계 탑에서 구호와 함께 유인물이 뿌려지면서 평소보다 큰 파도로 밀려왔다. 최루탄은 터지고 함성과 함께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와중에 청바지 짭새들에게 잡혀 끌려가면서 웃통이 벗겨지는 여학생들을 보니
가만히 앉아서 수업받는 내 모습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수없이 망설이다 말주변도 없는 나는 그 자리에 일어나서
"학우들이 저렇게 싸우는데 우리가 이렇게 수업만 받고 있을수 있나? 나가서 같이 합류하자!"
어설픈 발언 후 교실을 나왔다. 수업하던 교수님이나 의대 반 친구들 다 당황했을것이다. " 쟤 뭐야?"
( 지금의 아내가 된 그 자리에 있던 동기도 당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봤다한다.)
없는 능력에 어설픈 의협심은 미미하게 있었지만 그 이상 나설 용기는 없었다.
최루탄과 시위의 혼동 속에서 어설프게 군중 속에 동참하는정도 밖에 할수 없었다.
선도에서 잡힐 각오로 나서서 그들과 대놓고 싸울 용기는 없었다. 내게는 앞날이 창창한 가족들이 있었다.
어쨌거나 결국은 선을 넘지 못하고 비겁했다.
그렇다고 후회는 없다. 그 이상은 내 것이 아니었다고 지금도 믿는다. (내 장점은 자신을 아는것. )
내란죄선고한 군판사
징역 수년을 구형한 군검사
( 결국 전두환 대통령 취임후 사회 통합 차원 쑈로 수개월만에 전부 석방하는 촌극. 내란죄라면서? )
상무대 영창에서 잡혀온 시민들을 매일 고문한 군인들 (수사관들이 기간병이나 하사관들에게 고문 강요함. 이웃들인데.)
출소후에도 십수년간 계속 가는 곳 마다 따라다닌 경찰과 안기부 요원들 ( 김영상 정부때 까지도 )
버젓이 사회의 일원으로 뒤섞여서 곁에서 살아가고 있을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생활 할까?
정말 그런 혹독한 대우를 받을 만한 시민들이었다고 믿을까? 가해자로서의 부채는 없을까?
본인들의 행동에 죄의식이 있을까?
1980.3 부터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 발생 및 지속
5.17 자정 기해 전국 비상 계엄 확대
김대중 당국에 연행
5.18 광주 민중 시위 증폭
계엄군과 충돌및 유혈사태
사망자 발생
5.19 오후 5시경 최초로 공수부대가 시민군 사격 시작 ( 본격적인 사망자 속출)
5.20 금남로에 수십만명시민 시위동참
5.21 무기고 에서 총기, 탄약 ,폭탄 탈취
시민군 무장시작
본격적으로 계엄군들과 충돌ㆍ사망자속출 (도청에 수십구 쌓이기 시작)
계엄군 일시 철수 및 시민군 점령
5.22 도청 사수 하면서 기동순찰 실시
5.24 무분별하게 방출된 총기회수 시작 ( 회수 한다고 반납하는 사람들도 참 순진)
온건파는 반납했으나 투쟁파는 거부
5.26 오후 3시경 기동타격대 결성 ( 약 15시간만 활동한꼴 )
도청에서 많은 시민들 철수 권유받고 나감.
5.27 오전 3시넘어 계엄군 도청 진입시도
6시경 계엄군에게 패배
(광주시민들의 10일간의 민중 항쟁 종료)
5.28 상무대로 이송 후 조사 (고문 구타 조작 만연 )
5,7,11 공수, 20사단 2만여명 완전무장 군인
250여명 시민 학살 및 수많은 행불자들
5000여명은 505보안대, 상무대영창, 공군헌병대, 광주교도소, 광산 경찰서등에서 구속ㆍ투옥후 구타ㆍ폭행ㆍ고문 당함
: 당해 말까지 대부분 전두환 대통령 취임후 사회 통합 차원에서 수개월만에 전부 석방
초라한 학벌들....그런데 왜 나서서 시민을 지켰을까? 무슨 사회적 혜택을 받았다고?
오히려 받을 것도 못받고 경시 받으면서 힘들게 살아왔을 사람들...
과거의 동학 혁명도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이분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이들의 희생과 죽음으로 아마 제2의 계엄령을 감히 못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6.29 선언으로 귀결 되고 현재의 대한민국이 되었겠지.
그 시절에 내가 그자리에 없던것이 천운이었다. ( 절대로 나서지 못했다. )
그 자리에 있었다면 비겁했던 부채의식으로 평생 괴로왔을것이다.
거듭 정의를 위해서 자신을 산화시킨 수많은 분들과
황당한 인연으로 원통한 삶을 사신 분들에게 위로와 경의를 표한다.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PS) 하지만 너무 신격화 시키는 것은 또 다른 역사적 폭력일 수 있어 조심스럽게 반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엄청난 사태를 겪고나서 다음해에 국회의원 선거하는데 전두환의 민정당을
이렇게 많이 뽑아줄 수 있지? 야당이 가짜인 ( 안기부 자금으로 급조한 관제 야당 ) 민한당 뿐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민정당후보를 뽑을 수 있을까?
이게 뭔 일일까? 정말 이렇게 금방 잊어버릴 정도로 무식할까?
전라남도 전체 22곳에서 10명의 민정당 후보가 뽑혔다.
피비린내 났던 그 광주에서는 4자리중 2자리나 민정당후보로??
어떻게 이런일이? 이 사람들 정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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