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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야기

관동 대지진에 대하여

[관동대지진 考]

*이 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실] 과 [신사 참배의 진실]를 쓴건 1년이 넘었다. 그런데 다른글꺼리가 자꾸 생겨서 미루다가 잊었는데 컴퓨터 정리하다가 찾았기에...
反日정신병자들에게 욕좀 먹을란다. 오래전글이라 하오체임

우리는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며 길거리의 조선인들을 잡아서 무참히 학살하고 우물에 던져넣고 매장했다고 배웠습니다. 그게 사실일까요? 과연 진실은 무엇인지 탐색합니다.

우선 관동대지진 당시 동경과 인근 공장단지에 3만여명의 조선인들이 노무자로 일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공장의 기숙사에서 숙식을하며 단체생활을 하며 일했습니다...

1922년 여름까지는 조선인의 일본으로 입국을 금지했기 때문에 유학이나 업무상이 아니면 조선인들은 일본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요. 그러다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주창主唱 되고 조선의 선구자들의 요청으로 22년 하반기 <조선인의 본국입국 통제>가 해제됩니다...

그러자 22년 가을부터 23년봄까지 조선에서도 뿌리가 없는 무려 10만명의 조선인 청년들 대거 일본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조선에서 방면된 속인등 거의 하층민들로서 구쥬와 본토 서부에 정착하지만 그 중 3만명이 동경까지 올라가서 근교의 공장에 취업해 기숙사에 생활합니다.

그들은 1923년 여름부터 기숙사 밖으로 외출을 금지 당합니다. 왜냐면 처음엔 공장측이 통제를 안했으나 갑자기 통제 없는 생활에 취한 노무자들의 방탕으로 공장주변이 개판이 됩니다.

이에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모든 공장들은 노무자들의 외출을 통제합니다. 조선에서는 일상이던 무질서한 생활에 젖은 노무자들에게 일본의 도덕률을 훈련하지 않고 자유를 주면 어떤일을 저지를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몇달후인 9월1일 동경 도심지를 진앙으로 진도 7의 대지진이 일어나서 동경전체가 일시에 불바다가 됩니다. 당시 일본은 풍로에 숫불을 피워서 요리했는데 그 숫불 풍로가 지진으로 엎어지면서 대부분이 목재인 주택에 불이 붙은겁니다.

동경 인근의 조선인 노무자들이 거주하던 기숙사도 불이 붙었어요. 공장측에서도 그들을 통제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지진과 불바다로 혼잡한 상황에서 통제가 안되는 노무자들이 기숙사를 튀쳐나와 동경으로 몰려들어 갑니다.

아직 도덕률이 훈련되지 않은 그들이 통제가 안되니 할 일이 무엇이겠어요. 공장별로 100여명씩 무리를 지어 혼란에 빠진 동경주민을 대상으로 도둑질 폭행 겁탈등 걷잡을 수 없이 행동합니다.

경찰이 검거하는등 통제를 하지만 폭력화 된 3만명을 제압하기엔 역부족입니다. 경찰로도 통제가 안되자 군대가 동원되어 진압합니다. 경찰에게는 폭력을 휘두르다가 총을 든 군대가 동원되에 거리에 깔리자 무리를 지었던 약탈과 폭력은 잠간 주춤하더니 2-3명씩 소규모로 나뉘어서 다니며 겁탈과 도둑질을 계속 합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통행자들을 검색하여 조선인들을 별도 장소로 연행해 분리합니다. 동시에 재산을 지키려는 동경주민들도 건장한 사람들이 마을마다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말그대로 자신의 마을을 지킵니다.

자경단이 마을을 지키는 과정에 마을을 침탈하는 폭도들을 제지하고 붙잡은 폭도들을 군인들에게 인계합니다. 그 과정에 격투가 있어 상호 피해가 있었지만 자경단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이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군인들과 자경단이 조선인을 가리는 기준은 일본말이 서투른 사람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일본에 들어간지 1년도 안된 사람들이고 조선에서도 하층민이라서 일본어를 배우지 못해 서툴렀렸기 때문이지요.

당시 조선인을 가리는 방법이라는<10원10전>이란 발음(일본말로는 발음하기어려움)은 몇몇 자경단에서 사용한 경우는 있지만 보편화한 방법은 아니었어요
사실 나는 조선인을 일본말로 가리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로 가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건들거리던 일본인 깡패 10여명도 죽었어요.

초기엔 조선인들이 연행을 거칠게 거부하여 도망치거나 혹은 연행과정에 감시자를 폭행하고 탈출합니다. 그러자 일제는 폭도 연행 지침에 <폭도들이 연행을 거부하거나 연행중 탈출하면 베어도 된다>는 지침을 내립니다. 그때부터 폭도조선인들이 일본군의 총이나 칼에 맞아 죽습니다.

일본정부가 왜 그렇게 강경진압으로 전환했는가? 당시 대피장소에 피난해있던 동경 주만들에게 폭도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해 있었어요. 당시 일본인들이 쓴 일기엔 그게 적라나하게 씌여져 있습니다.

당시 신문 르포에 실린 일기엔<조선인들이 몰려온다는 소문이 돌자 공포에 질린 부녀자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혹은 <조선인이 대피소 문을 열고 들어오면 혀를 깨물어 자결하겠다> 또 <내가 무서워서 울자 조선인들이 오면 오빠가 나를 목슴을 걸고 지켜준다고 안심시켯다>는등 부녀자들이 극단적인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공포에 질린 피난민들은 일제히 정부와 군부에 폭도들을 진압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본 군부는 폭도조선인들을 강경하게 진압하라고 지시한 것이지요.

관동지진 때 조선인 학살에 대한 주장중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가 있어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먼저냐?> 혹은 실제 <조선인의 폭동이 먼저냐?>고 다투는데.. 나는 분명히 조선인 폭동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학자들은 일본인들의 지진공포를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시선돌리기 차원에서 조선인들을 학살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건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예요.

무려 진도 7이 넘는 첫방이 터지고 그후 3일간 200여회의 자잔한 여진이 터져서 대피소에 모인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있는 상태인데..일본정부가 등신이 아니고서야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다닌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주민들의 공포를 더욱 증폭 시키는 등신짓을 할 리가 없어요.

오히려 조선인의 폭동으로 주민들이 지진에 더해 더욱 동요 될까봐서 2-3일간은 그 사실을 숨겼습니다. 그래서 일본 언론은 초기에 폭도들의 난동을 숨겼기에 조심성 없이 다니던 일본인들의 피해가 커졌다고 일본 정부의 실책이라 질책하고 평론했어요.

그 사실이 대피소에 알려진것은, 동경에서 재물을 수습하고 뒤늦게 대피소로 합류한 사람들이 대피소 주민들에게 “동경시내가 폭도조선인들의 강간과 폭력으로 난장판이 됐다”고 말해서 알려졌습니다. 부녀자들이 그 말을 듣고 공포에 질리고 격앙된 것이지요.

나는 1920년부터 동경에 거주하시던 나의 祖고모님(아버지의 고모)께 대지진 당시 상황을 들었습니다. 조고모님 曰 “동경의 공단지대에 일하던 조선에서 온 수많은 상놈들이 시내에 들이닥쳐 시내 전체가 불바다인데 마구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하고 난리가 아니었답”니다. 그놈들은 군대가 동원되자 진압됐답니다.

당시 동경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지인들도 아버지와 대화중 그런내용을 말해서 놀랐습니다.
후에 여로다방의 이서구선생님등 어른들에게서 들은 관동대지진에 대한 이야기도 위의 내용과 대동소이합니다. 이서구선생님은 당시 동경에 체류하면서 위에 쓴 상황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또한 1923년봄 18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시내의 가구 목공소에서 일을 배우던 우리집 속인아재는 지진에도 불타지 않은 목공소에서 시내쪽으로 구경 나왔다가 몽둥이와 체인을 손에 감은 폭도조선인들의 행패를 목격했습니다.

아재는 자경단에게 붙잡혔는데 떠듬떠듬 자신은 폭도가 아니라고 말히자 자경단이 폭도들과는 다른 옷차림과 아재의 행동을 믿었는지 군대로 넘기지 않더랍니다. 풀려난 아재는 목공소까지 가는게 두려워서 오히려 자신을 보호해달라 요청하자 어느 자경단원의 집에서 며칠 머물게 해줬답니다.

대지진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 기록은 모두 동경에 있어서 열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주요 신문들은 내가 머물렀던 구마모도의 현립 도서관에서 열람했습니다. 신문기사의 내용은 위에 쓴 내용과 대동소이합니다. 이상이 20여년전 동경대지진에 대해 내가 본격적으로 탐색한 내용입니다.

폐일언하고 이게 사실인지 아니면 내가 잘못된 탐색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나는 이게 사실이라 믿습니다.

 

 

경찰서에있는 사람들까지 이랬다면 이건 집단 학살인데ㆍ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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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퍼져있는 일반적인 해석

간토(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시사상식사전

1923년 일본 관동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 수습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조선인들에 대한 유언비어를 조장해, 조선인들에 대한 대량학살로 이어진 사건을 말한다.

본문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일본 간토(關東)지방에 매그니튜드 7.9, 최대 진도 7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지진은 대규모의 화재와 해일, 토네이도로 이어지며 도쿄의 60%, 요코하마의 80%를 파괴했다. 일본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이 지진으로 사망자 9만 9,331명, 행방불명 4만 3,476명, 가옥 전파(全破) 12만 8,266동, 반파(半破) 12만 6,233동, 소실 44만 7,128동, 유실 868동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런데 지진 다음 날인 9월 2일 발족한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은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내각은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집어넣었다!' '조선인의 배후에는 사회주의자가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이것을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때문에 유언비어가 기정사실화돼 일본인들은 대대적인 조선인 색출을 시작했으며, 전국적으로 조직된 3,689개의 일본인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조선인 학살이 시작됐다. 이때 일본 정부와 언론은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더욱 선동하고 방조함으로써 우리 동포의 피해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당시 일본인에 의해 살해당한 조선인은 가장 보수적인 통계에 의하더라도 2,500명이 넘고, 문헌에 따라서는 6,000명에서 1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일본 정부는 이 혼란을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인 좌익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한 기회로 삼아, 노동운동가 히라사자와 게이시치(平澤計七), 사회주의 지도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부부 등 일본의 진보적 인사 수십 명을 검거해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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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인 해석

1. 국국주의가 팽배해 지면서 일본내 노동인구 감소. ( 젊은사람들의 군 입대 증가 )

2. 그동안 금지했던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입국 완화. (기타 국가에서도 입국 )

3. 많은 조선인들이 돈을 벌기위해서 자진 입국

                 ( 국내 상황이 불량하였으니 돈벌기 위해서 밀입국도 많았을듯 ) 

4. 갖은것이 없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자연히  3D 노동시작으로 몰리면서 정착촌 형성

5. 주변 일본인들의 괄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반일 감정이 더 생김  

                 (1970년대에 한국인 이민자에게 일본인들은 집을 세주지않았음 .

                   그때 까지도 한국인들에 대한 지져분하고 거짓말 잘한다는 나쁜 인식이 퍼져있었음.)

6. 동경 대지진으로 사방이 불바다가 되니 괄시 받은 조선인 노동자들중 어느정도는 분명히 폭동을 일으킬 수있음.

    ( 이건 인간의 본성으로 미국같은 공권력 강한 선진국에서도 자주 발생되는 당연한 일,

       그런면에서 5.18 당시 광주 주민들의 이성적인 상황은 대단한 인류애적 업적 인정. )

7. 처음에는 두려움으로 떨다 마음의 안정을 찾고 쌓였던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

      ( 강도, 폭행, 강간, 살인 뭐든지 가능 )

    가족을 지키려는 일본 자경단이 먼저 일지 억압받은 수많은 나라에서 들어온 억울한? 노동자들의

      폭발이 먼저이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분명히 서로간에 쌓인 분노가 대지진의 불길 속에서

     폭발했을듯.  치안부재의 상황이 익명성을 담보해주니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

8. 일본 사회에서도 골치거리였던 정치 집단을 제거하는 좋은 기회로 봤을것이고

9. 이번 기회에 한몫 잡으려는 단순한 좀 도둑놈들도 난리였을듯

10. 한바탕 미친 굿판이 거치고 나서 서서히 이성이 돌아와 평정심을 찾았을듯.

        약간의 양심적 후회도 하고 적당한 변명도 하면서.

 

결론적으로 그동안 우리나라 국민들이 역사교육을 분별없이 (무조건 이유없이 억울하게 당한것 처럼)  받았듯이  무조건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헛소문 퍼뜨리면서 살인 발악을 한것이 아니라

 천재지변의 혼란속에서 죽음을 앞 두고 충분히 발생 가능한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연장선상에서의 인류적 불행한 사태였다고 보는 것이 좋을듯하다.   그게 상식에 맞는 역사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너무 착한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고 가르치는것은 우리가 바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 밖에 안된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럼 착한 딸이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는데 옆에서 못본척 가만히 있던 조선의 수 많은 남자들은 뭘 한건가?

자신들의 얼굴에 침뱉는 꼴 아닐까?  그러고도 나라를 잃지 않길 바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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