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사에서 암울했던 구한말 시기, 흑백논리로 분열시켜 국민의 삶 도탄에 빠져
경제성장에도 무능한 정치로 국격 떨어져
헌법 훼손하며 언론중재법 통과 서두르는 與, 나라를 후진국가 대열로 밀어내면 안 돼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역사가들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비참했던 때는 구한말이었다고 본다. 유학의 형식논리를 신봉해 온 지도자들이 인간관계와 선악 관념을 흑백논리로 압축시켰다. 그 결과는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물론 사회적 삶 자체를 분열시켰고, 서로 적대시하는 싸움터로 전락됐다. 승자가 남고 패자는 생활 영역에서 버림받았다. 지도자와 관공리들은 관권과 이권욕에 빠져 원수를 갚고 은혜를 갚는다는 명목 아래 국민의 삶을 도탄으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35년의 굴욕과 해방, 6·25의 역사를 거쳐 지금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권력사회를 법치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4, 5년 동안 다시 국격은 떨어지고, 국민들은 자부심을 잃어가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 책임을 고정관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기득권 세대와 정치계의 후진성과 무능에 묻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광복절을 전후한 한 달간에서도 나타난 현상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있었던 올림픽 경기만 해도 그렇다. 우리 대통령이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만 한 아량과 지도력만 있었다면, 잡다한 정치·경제관계를 미루어 두고 일본 총리에게 축하와 협조의 예를 먼저 갖추어 일본 정치인들보다 높은 수준의 도량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청와대 수준이 그 정도니까 우리 선수단 숙소에는 이순신 장군까지 등장하고, MBC는 국제적 망신을 자초했다. 올림픽 정신에도 어긋나며 국제무대에서의 부끄러움을 국민들에게 돌리는 결과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북측에서 일방적으로 단절했던 전화가 개통됐다고 해서 여당과 청와대가 얼마나 떠들었는가. 희망의 문이 열릴 듯이 일부 여당 정치인들이 반색했다. 통일부는 북에 줄 예산과 코로나19 백신 문제까지 언급했다. 북에서는 한미 군사훈련을 감행하면 그에 해당하는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끊어버렸다. 동포 간 문제여서 인내심을 갖고 청와대가 선처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격은 어떻게 되나. 남북관계를 주종관계로 이끌어 가도, 국민들까지 뒤따라갈 수는 없다.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와 천안함 사태도 재연할 수 있다는 북측의 엄포였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에 주재하는 중국대사까지도 한국 정부에 훈시 내릴 정도의 상황을 누가 만들었는가.
8월은 광복절이 있는 달이다. 온 국민의 기대와 희망이 되살아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정부는 행사를 위한 의무적 식전을 꾸몄고 국민들의 관심과 기대는 역작용으로 나타났다. 대통령 경축사는 계속 들어오던 업적 자찬이었고, 누가 책임질지도 모르는 미래의 꿈을 되풀이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본에는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성명이었다. 잘못은 일본에 있다는 인상이다. 그동안 대일정책에서 우리는 명분도 찾지 못했고, 일본의 경제적 제재는 기업들이 걸머지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을 놀라게 한 것은 광복회장의 기념사였다. 친일파를 끝까지 숙청하는 것이 최고의 과제임을 강조했다. 이런 자가당착의 성명을 듣는 국민들로서는 믿고 따를 지도자가 없어진 셈이 되었다.
같은 때 추진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 귀환과 현충원 안장 절차에는 대통령의 정성과 예우가 극진했다. 그 이상이 없을 정도였다. 국민들은 그의 환국을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홍 장군 후반기의 행적과 민족주의 독립군에게 어떤 가해를 입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역사가들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들도 문 대통령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묻게 될 것이다.
작금에는 민주당 지도부들이 ‘언론중재법’을 대선 승리와 정권 계승을 위해 통과시키려고 서둔다. 문 정권의 정치 과정을 보아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까지 훼손시키며 국격을 후진국가 대열로 밀어내는 우를 저지르지는 않기를 원했다. 그것은 성숙한 국민의 언론 질서가 해결할 문제이지 법과 권력으로 수개월 안에 끝날 과제가 아니다.
이제 대통령이 언론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선언하고도, 국회의 결정이 국민의 뜻이라고 수용한다면 국민은 헌법이 부여한 자유를 지키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대한민국을 더 이상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정권은 바뀌고 끝날 수 있어도 대한민국의 역사와 번영은 영구히 지속되어야 한다.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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