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욕을 들을 말이지만 사실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지겹게 많이 들어왔다. 물론 내 얼굴은 과거 20세기 취향이지
현재 21세기 취향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아무튼 한때는 내가 봐도 괜찮았다. 나르시스 처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으로 보면서 감탄 할 때도 한때는 있었다. 일본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누누히 들었으니 사실은 사실인가보다. 요즘은 세월따라 살이찌고 똥배에 콧털까지 하얗게 되는 중년이 되어 한숨나오지만 누구나 겪는 과정이니 다 기쁘게 받아들인다.
빼빼하던 동생은 LA 살면서 꾸준히 운동을 하니 지금은 액션 영화배우 수준의 몸매를 유지한다. 확실히 성실한사람은 세월도 이기는것 같다.
그런데 요즘도 내가 의사라는 전문직으로 생활하면서 얼굴 덕 많이 본다. 일단 평범한 의술을 지닌 나를 의사로서 신뢰해 주고 나의 치료에
감사하는 분들이 내게 인상이 좋다는 덕담을 자주 해 주시는 것 보면 분명히 치료에 믿음을 더 주니 사회생활에도 도움이 된다. 그런 면에서는 부모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치아도 비싼 교정치료 받은 사람 이상으로 가지런하고 얼굴도 특별히 공사한 것 없이 인상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초등학교 4학년때 물안경이 눈 앞에서 깨져서 얼굴 60바늘을 꿰맨 사람이 장님 안되고 이런 소릴 들으면서 살고 있으니 정말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솔직히 다리도 짧고 나만이 아는 단점들이 많지만 인상 좋은 것은 정말 세상 사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앞으로도 심신수양을 지속해서 인상을 잘 관리 해야 하는데 자꾸 화내는 얼굴을 만든다고 막내 수진이가 자주 충고한다. 잘못하면 오던 복도 달아나겠다. 요즘 내게 너무 많은 복들이 있는데 말이다.
(뉴질랜드 거울 호수)
하지만 나름 힘든 과정도 있었다.
내 첫인상만 보고 사람들은 나를 단정짓고 그 범위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평가절하 해버렸다. 신화의 ‘프로크루테스의 침대’가 생각날 정도의 경우도 있었다. 목사님 자제들이 잘 크기 힘든 것이 이런 선입견때문이 아닐까 싶다. 혼자 가만히 앉아있는데 타인들이 북치고 장구치는 것을 쳐다 보고만 있다가 뒷통수를 맞곤 한다. 초등학교때야 그렇다 치고 중학교 때는 키도 크고 반장을 해서 가을 운동회때 차전놀이 대장을 했다. 근데 호령 목소리도 작고 자세도 어정쩡 해서 운동회 연습 내내 심한 지적을 체육 선생님께 엄청 많이 받았다. 개인적으로도 노력해보려고 여의도 윤중제에서 목청 티우려고 발성 연습을 했는데 결국 목이 쉬어버렸다. (막판까지 혼나면서 힘들게 마무리 했는데 하필 당일에 계획과 다르게 상대방이 먼저 떨어져서 어설프게 끝나버렸었다.) 남녀공학 고등학교때는 여학생들에게 입학 초기에는 내가 인기 있었는데 내 목소리를 들으면 깬다 했고 유머도 말주변도 없으면서 발음이 어눌하다고 뒤에서 한소리 들었다. 평소 독서와 거리가 한참 있는 내가 갑자기 남녀 독서 토론부로 초대 되어서 (독서애호가로 보였는지) 무식함이 들통나는 황당한 경우를 겪곤했다. 사춘기 시절 마음에 상처가 컸다. 그래서 대학 들어가자마자 시작한 것이 독서와 발음 연습이었다. 종로3가에서 하루종일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특히 여학생들에게) 무조건 말을 거는 연습을 몇일간 했다. 웅변학원 다니는것은 아닌것 같아서 그렇게 했는데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참 한심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 들어가서는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내게 가시있는 농담을 하곤했다. “넌 딱 보면 수석입학생 같아. 근데 알고 보면 전혀 아니란 말이야.”
“ 목사님 아들같은데 ... 아니야.” 본과 학생때 병원실습 돌면서 교수님들이 질문하시는데 답 못하면 여러학생중에 꼭 나는 머리를 맞으면서 한소리 들었다. “마 너는 얼굴 값좀해“ 특히 마취과 교수님은 기본이 안돼어있는 나를 정말 한심한듯 쳐다 보시면서 지금도 기억나는 한마디를 하셨다. ”그 얼굴에 미역국이 아깝다.“ 그래서 어떨때는 아예 공부 안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편할 때도 있었다. 저놈은 원래 그러려니 하게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형편없는 의과대학 성적에도 나는 나름 열심히 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뛰어난 우등생들에 비해 학업 외적인
면으로 많이 빠진것은 사실이지만 양적으로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 동기들이 들으면 웃으려나? ) 공부하는 모습 안보이려고 학교 도서관에서 안하고 혜화동 로타리 사설 독서실에서 혼자 라면 먹으면서 밤새워 공부하고 간혹은 힘들때면 혜화동 성당에서 기도까지 하면서 (이럴때는 시끄러운 귀의 이명도 안들린다.) 매 시험 최선을 다했다. 생긴것 멀쩡한 선배가 유급해서 와 후배들에게 도움을 못줄 망정 시험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동급생인 후배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성적이 그런 과정을 거쳤다면 솔직히 더 창피한 일이니 아예 공부와 거리있는 부류라 인정 받는것이 훨씬 더 속편했다. 그래서 일부러 보란듯이 시험기간에 술도 마셨다. 결국 악순환이다.
아무튼 예과 학생때 생화학 실습에서 황당하게 유급 당한후에는 (왜 다른 과목처럼 재시험을 보고 기사회생할 기회도 안주고 나를 1년을 썩도록 그렇게 만들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가고 분하다. 1년 푹 쉬고 다음에 그 과목 A+이루는데 딱 3시간 걸렸다.) 내 인생 내 포부 내 자존심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리고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그 이후로는 모든일에 자신이 없었다. 좋아하는 동급생이었던 여학생이 공부 힘들어하는데 나는 학년이 내려가는 바람에 어려운 임상공부에 도움을 줄수도 없는 한심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의과 대학은 타 과와는 다르게 졸업 기준이기 때문에 나는 친한 83입학 동기들과 서먹한 90졸업동기들과의 중간에 끼어 어정쩡한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 지금까지도 그대로다. 사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 내가 적극적으로 후배들과 친할 수 도 있었는데- 내가 마음이 넓지 못해서 그렇지 못하고 주변으로만 맴돌았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세월이었다. 그냥 학교의 모든것이 싫었다. (사실 그때 군입대 했어야했다는 후회를 지금도 많이 한다. 그럼 내 인생 많이 바뀌었을 것 같다.) 그래도 항상 자심감 있는 양 학교에서는 오버하고 자주 산에 들어가 정신을 빼놓을 정도로 몸을 피로하게 만들고 암벽하다 다치고를 반복하며 세월을 깎아내곤했다. 부모님 속 많이 썩혔다. 하지만 결국 내가 도움을 못줬던 그 여학생이 (세번을 사귀고 헤어짐을 반복했다) 지금의 내 아이들 엄마이고 내가 원하던 정형외과를(당시 최고 인기 전공과목) 산악부 선배님들의 추천으로 할 수 있는 지금의 내 삶이 새옹지마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젠 나이 50이다. 이제는 나 자신의 내면을 알차게 잘 가꾸어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고싶다. 지갑에 겹친 지폐뭉치나 멋진 외제승용차
혹은 손목에 둘러있는 값비싼 시계보다 대화에서 풍기는 다양한 지식과 감성으로 주름과 잡티 피부의 너털 중년 얼굴을 화사하게 화장하고
싶다. ( 여성호르몬이 나이들면서 분비 된다더니 요즘은 요리학원도 다녀보고 싶다. ) 이제는 오직 나만을 생각하고 나를 위한 지금을 만끽하는 연습을 시작하고 싶다. 연습하다 보면 10년 뒤에는 빚진 마음없이 온전히 나를 위한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 믿고 싶다. ^_^ ) 주위를 둘러보면 지인들 중에 스승이 될 만한 분 많고 수많은 책과 지식 창고들이 IT로 무장해서 항상 내 곁에 얌전히 앉아있다. 지금이라도 이런 보물들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자주 접해야겠다. 솔직히 인간 박영근의 인생 윤곽은 대충 잡혔으니 앞으로 큰 모험은 의미가 없다본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하면 된다'는 구호를 외치기엔 너무 똑똑해져서 진실성이 없다.
지금의 내가 바로 나인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더 나아질 수 있다 믿는다.
난 원래 항상 뭔가를 찾아 헤매는 그런 부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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