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위치로 병원을 이전하고 얼마 안돼서 남극에 건설중인 장보고 기지현장에 수술 가능한 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고민끝에 담당자를 만나서 협상했다. 당시 남극까지 갈 정헝외과 전문의는 없을테니 가겠다는 의향을 보인 내가 필요해서인지 몰라도 현대 건설회사에서 직접 병원까지 찾아왔다. 총 9개월간의 근무 기간동안 그 중간에는 귀국할 방법이 없으니 그점 각오해야한다고 했다. 많은 걸림돌이 있었지만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를 놓치고 싶진않았다.
아이들도 눈에 밟히고 집안 어른들도 조금은 걱정되긴 했지만 가고 싶었다. 역마살이 또 발동하기 시작했다. 9개월간 남극에서의 생활하기가 힘든 환경이겠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대자연의 웅장함과 극도의 홀로됨 그리고 자잘한 사회 파편들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의 연락이 오고 간 후 당시 휴직 중인 다른 의사가 가기로 했다고 연락을받았다. 많이 아쉬웠다. 내가 병원을 정리하는데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이 걸림돌이었던것 같다. 내게 인연이 아니라 생각하고 미련을 접었었다. (사실 그때 갔었으면 갑자기 췌장암 진단받고 3개월만에 소천하신 아버지 임종을 못할뻔했다.)
그리고 8년여의 세월이 흘러 2일전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남극에서 의사를 뽑는데 본인이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장보고 연구소는 수술할 의사를 찾지만 세종 연구소는 비수술 전공의사로 충분하다니 조건은 맞는것 같았다. 소아과 전문의인 친구는 현재 휴직중이고 등산을 수 없이 다니는 수퍼맨이라 체력적인 면은 분명히 괜찮을것 같은데 외향적인 성격상 9개월을 남극에서만 살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조언아닌 조언을 했다. 그 좋아하는 ( 매일 최소 한병씩 마시는 ) 와인도 못마실텐데...
그러면서 장보고 연구소에 대한 미련이 갑자기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다. 공고란을 찾아보니 하필 그날이 마지막 접수 날이었다. 집에 와서도 밤새 고민하다 다음날 전화로 남극 연구소 근무를 신청했다. 나같은 경험 많은 정형외과 의사가 가겠다면 접수기간이 하루 지났어도 얼마든지 반갑게 받아 줄 알았다. 그런데 반응이 의외였다.
"접수 이미 끝나고요 지금 여러 지원자중에 심사중입니다."
정형외과 전문의로 경험이 20년이 훨씬 넘는다고 했는데도 전혀 반기는 기색이 없다. 나처럼 경험 많은 사람이 또 지원했다고? 아니면 그냥 젊은 의사를 선호하는것일까? 하여간 또 한번 남극으로의 꿈이 전화 수화기 내리는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이제는 그냥 TV 로만 만족해야할 듯 싶다.
과거 쓸데없는 사소한 고민으로 망설이다 아프리카에서 한달간 의사로서 병원생활의 기회를 놓치고나서는 한동한 후회했다. 당시 영화 < 백만불의 유혹> 에서도 나왔듯이 한번의 큰 후회 이후 나도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 안하리라 마음 먹으면서 무엇이든지 기회가 있으면 일단 경험하면서 살아왔다. 결국 후회가 되더라도 일단 시도는 해왔다. 하지만 남극은 벌써 두번째 실패. 이건 내것이 아닌가보다. 어쩔 수 없지 내게 시절 인연이 아닌것이니까. 그래도 후회는 없다. 시도는 해봤으니까.
나 대신 가는 의사분 잘 지내다오시요. 부럽긴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