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결혼하고 한참 병원에서 일할 30대 였던것 같다.
아버지는 살아보니 제일 좋은것이 정도를 걷는 인생이더라 말씀하시면서 물어보셨다.
"내 인생 성공한것으로 보이니?"
전라도 보성 시골에서 태어나 광주유학을 거쳐 우리나라 최고 대학인 서울대학교를 나오시고
(우리집 가문에 60여년이 지난 아직도 서울대 출신이 없다.)
그 당시 제일 취직하기 힘든 은행권에 당당히 취직하셨다.
해외를 나간다는 것이 민간인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1970년대초에
오사카 지점으로 발령받아서 우리가족을 선진국 일본에서
환상적으로 3년 넘게 생활할 수 있게 하셨다. (한국에서만 비싸던 바나나 엄청 먹었지.)
귀국해서 당시 한국에서 제일 좋은 동네라는 비행장있던 여의도에서
우리 삼형제를 다 키워주셨다.
여의도 초,중,고를 진급시 옆 담장만 넘으면서 보행 등,하교로 편하게 다녔다. (게다가 남녀공학)
대학과 대학원, 유학등으로 우리 삼형제를 잘 도와주셔서
지금은 3형제가 서울,뉴욕,LA에 각자 터를 잡고 잘 살고 있다.
제일 은행에서도 상무 이사까지 하셨으니
군인으로 치면 장군으로 최소 준장 이상은 하신것인데
별로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는 말씀에 나는 황당해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 무슨 욕심이 저렇게 많으실까? 그 많은 성공을 하시고...'
아마 서울상대 58회에는 유명한 분들이 많이 계서서(사공일씨, 박찬종씨등)
친구에게 느끼는 가벼운 상대적 열등감일것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그리고 수십년이 흐른 요즘
서울의 작은 진료실에 앉아서 환자 기다리면서 상념에 젖어들다보니
과거 아버지의 그 말씀이 불현듯 생각나곤 한다.
여의도 한양아파트 거실의 대나무 소파에 앉아서 말씀 하셨던 그 순간이
또렷하게 다 기억이 난다.
내 아들이 내년에 30줄에 들어서니 나도 몇년이내에 그 당시 아버지 나이가 된다.
'나는 과연 어떤가?'
좋은 부모의 보살핌으로 큰 고난없이 초중고교 졸업하고
의대 나와서 좋은 선배 스승님들 만나서 인기 있다는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었고
수술도 많이 하고 좋은 병원 다니면서 다방면으로 경험도 많이 쌓았다.
우리 가문 최초로 의학 박사 학위도 땄고
미국 유명 병원에서 단기 연수도 했으며
미국 대학 초빙 교수로서도 지내봤고
지금은 서울의 강남 끝자락에서 작은 건물 짓고 작은 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비록 병원급 원장은 아니지만
의사로서 살아가는데 부끄럼 없이 교과서 치료로 살 수 있는
자칭 유능한 의료인이다.
원하던 미국 전문가 영주권을 획득해서
(신청 2달만에 받았으니 내가 그만큼 가치있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새로운 시도를 여러가지 해봤고 (10여년간 10여회의 해외 의료 봉사 포함)
오레곤에서 6개월 살면서 아름다운 자연에 파묻혀서 선진국 국민 경험도 했다.
내가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최대한의 모든 기회를 선물로 줬으니
내가 부모에게 받은것 이상으로 빚진 것은 어느정도는 갚았다고 본다. (물론 아직 다는 아니다.)
우리 부부는 여러 상황 때문에 제대로 시도해보지 못하고 영주권을 포기했지만
내 자녀들은 각자 알아서 할것이라 믿는다.
현모양처 아내와 성실한 3자녀까지 다 여러 풍파는 있었지만
다 견디고 이겨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오늘의 실수를 내일 만회할 수 있는 체력이 있으니 감사하다.
최소한 남보기에는 그럴듯 할 것 같은데 아버지의 그 말씀이 요즘따라 자꾸 생각난다.
" 내 인생 성공한 것일까?"
(1970년 저 오사카 박람회를 참관했었지...)
부모님이 내게 초창기부터 (대학 와서 들어보니 친구들중에 과외를 한놈이 별로 없었다.)
비싼 과외를 시켜주면서 최선으로 도와주셨었는데
후회없이 죽어라 공부한것 같지도 않다.
결국 대학입시를 잘 넘기지 못해서
(영어 난독증이 있는 듯 학력고사에서 영어 50문제중 반타작을 하는 바람에 ) 뜻과 다른 대학에갔다.
입학하고 가서도 학교에 정을 못붙이고 밖으로 돌면서
산과 음주 속에서만 싸돌아다녔다.
성적관리를 못해 유급받은 후 더더욱 정을 못 붙였고
다양한 음주 사건에 빙벽 암벽 등반등 무모한 모험으로 다치기도 자주 했었지.
(그때 추락사고후의 이명으로 40년째 하루 종일 시끄럽게 산다.
내가 무딘사람이니 다행이지 24시간 이명과 살면 보통 미칠것이다.
부모 속 썩힌 죄값이다.)
결국 졸업후 레지던트 수련도 학교 밖으로 나갔고
의대 동문 모임에는 졸업후 (입학 동기 모임만 간혹) 단 한번도 안나갔다.
천운으로 여수 김인권 원장님과 동료로서 수술 하면서 의사다운 의사가 될수 있었으나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깨끗이 포기하후
서울의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 내 보배 셋째 수진이가 그때 세상에 만들어졌다.ㅎㅎㅎ)
부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고 편하게 개업했는데
개업 초기 2년간 365일 진료와 수술을 하면서 병원 운영에 최선을 다했지만
경영 마인드 부재로 병원 급으로 더 크게 못키웠다.
성남을 거쳐 서울로 입성했지만 과거 그 수많은 수술을 집도한 정형외과 전문의사로서
수술다운 수술은 못하고 의원급 점방으로만
심평원의 일방적인 삭감에 짜증내면서 지금까지 근근히 유지하고 있다.
코로나 타격을 직방으로 맞고 오늘 내일 간신히 버티면서
절간처럼 조용한 진료실에 앉아
근무중에 이런 글이나 쓰고 있다.
'지금의 내가 괜찮은가?'
'나는 잘 살아온건가?'
근데 인생의 목표가 나 자신의 행복이라면
각자 달란트를 인정하고 만족하면 되는것이 아닐까?
비록 타인이 보기에는 내가 한심한 면이 있을 지는 몰라도
내가 만족한다면 뭐 어쩌겠어?
모든것은 다 상대적이니 말이다.
완벽한? 그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행히 아직까지는 내 가족들이 나를 믿고 사랑해주고 있으니 성공한 삶이다.
완벽하다고 본 빌 게이츠도 이혼당하고 뭐 이상한 소문도 들리는 단점있는 인간이던데
나라고 별수 있겠나? (그래 나를 욕하는 당신은 참~ 잘났다. )
열등감이 인생 최대의 적이라 하지 않나?
비교하지 말자.
비교하면 혈압만 올라가지 달라질것도 없다.
'그래 아직은 괜찮은것 같다.'
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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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첫 번째 기준은 자기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은
대가를 바란다는 것 입니다
내가 이렇게 희생했으니 칭찬을 해 주든지
상을 주든지 할 거라고 기대합니다
기대대로 안되면 불만이 생기고 억울하다고 할 것 입니다
내가 먼저 즐거워야
상대를 즐겁게 해줄 것 입니다
나의 즐거움과 행복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 입니다
ㅡ모셔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