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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애양병원의 신축 건물을 보면서



애양병원의 신축 건물을 보면서

1999년 겨울 외과 의사로서 최상의 컨지션이라 자부하고 찾아간 여수의 애양병원.

1-2명의 정형외과 인원으로 하루에 인공관절 수술을 10여건 하는 것을 보고 놀랐었지.

지금도 3-4명의 정형외과 의사가 연간 3000건이상으로 전국 최다 수술건수를 이루고 있다

나환자나 소아마비 환자수술하던 시골의 조용한 선교사 병원이 이렇게 커졌다.

그곳에서 난 의사로서 뿐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많이 성장하였다고 자부한다.

무엇보다 평생 기억될 내 멘토를 만났다. 너무 높아 다가가기 힘들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면 뭔가 모를 기운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다분히 인간적이면서도 신실한 신앙인인 그런 위대한 존재감으로 한 병원을 일읕키고 있는 분이 시골 구석에 계셨다.

내겐 너무나 큰 혜택이자 경험이었다는 것을 그를 떠나온 뒤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깨우치고 있다.

김인권 원장님은 이 병원의 산 증인이시다.

갓 전문의 따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30여년동안 한 자리를 지켜오셨다. 서울에 계셨으면 참 사회적으로 성공할 시기를 시골 순천, 여수 구석에서 사모님과 함께 환자를 위해 보내셨다.

‘한국에는 왜 내 뒤를 이을 젊은 의사가 없냐’는 서양 선교 의사 토플 선생님의 하소연에 바로 자신이 오겠다고 하신지 30여년. 토플 선생님은 김인권 원장님에게 자리를 넘기고 케냐로 가서 지금도 의료 활동 하신다.

(토플선생님의 한국 이름은 도성래 이시다. 자주 화 내는 성격이라 ‘또 썽낸다‘는 뜻이란다)

이런 분들을 보면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한다.



시골 구석의 2층짜리 건물이 내가 근무하는 동안 3층으로 증측 됐고 작년에

좌측 큰건물을 추가로 세워져서 명실상부한 전문병원으로 우뚝 섰다.

나환자촌에 처음 생긴 초가집진료소가 100여년을 거치면서 이렇게 발전했다.

그 과정중에 잠시라도 내가 근무 했다는 사실로 이 사진을 볼 때 마다 내가 한 것이 없으면서도 마음이 정말 뿌듯하다.

‘내게 준 것이 아니면 탐 하지 말라’했는데도 주제넘게 자꾸 이곳에 미련이 남는다.

한 인간의 신앙심과 의료인으로서의 성실함이 이런 기적을 이루니 참 대단하다.

물론 직원들의 헌신적인 봉사도 큰 힘이 되었겠지....

이런 것이 100년이란 전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꼭 혼자만의 결실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확실히 선장의 능력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해본다.



내 태어난 고향이라는 억지 인연을 만들고 과거 CMF수련회때 딱한번 간곳이 이곳이라는 운명적인 고리를 만들려 애쓴다.

지금은 많은 것들에 섞여서 서울 생활을 세속적으로 살더라도 언젠가는-일단 잠시라도-

다시 가봐야 후회 없을 것 같다.

남해 바다가 보이는 수술 방에서 땀 흘리면서 다시 수술해보고 싶다.

그래야 내게 목표가 생기고 오늘을 보낼 수 있는 힘이 날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이미 외과 의사로서의 체력과 정신이 많이 죽었다.

그런 상태를 오히려 마음편히 즐기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아들로서 또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나만 내세울 수도 없다는 상황이

오히려 내게 그럴듯한 변명을 만들어준다.

그래 사실 세상 그냥 편하게 좋게 좋게 살면되지 뭐 내가 별거라고...

오늘도 얼마 되지도 않은 외래 환자 수를 보면서 원무과장과 결산 회의를 한다.

그래도 난 항상 이 사진은 볼 것이다.

아직도 꿈틀 거리고 있는 그 무언가가 소멸되어 없어지지 않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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