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대신하기 여행
아버지가 병환중이시라 갑자기 내가 막내 숙부님을 모시고 전라도 보성 문중 시제에 다녀오게 되었다. 항상 새벽에 병원 출근하여 주말이면 하루종일 잠을 자야 회복하는 바쁜 아내도 집안의 종부로서 따라가는것 보니 속이 깊다. (역시 장녀는 다르다.)
이왕 멀리 가는것 일찍 가서 외가댁(회천)에 들려서 외숙부님과 큰이모님께 인사도 하고 한동안 찾아뵙지 못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도 갈 계획을 세웠다.
집안의 장손으로 아버지가 수년동안 가셨던 그 보성 고향의 시제를 본의 아니게 내가 갑자기 가게되니 머리도 어깨도 다 무겁다. 스쳐가는
농촌 풍경을 보이는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리니 마음까지 찹찹하다. 앞으로도 수 십 년은 더 아버지가 집안의 장손으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실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침 6시 30분에 떠난 버스는 10시 안돼서 광주에 도착하고 약속된 외숙부님께서 마중 나오셨다. 우등 고속은 참 편하다. 그런데 이제는 거의 다 우등 뿐 이니 그만큼 사람들이 편함에 익숙해져간다.(지구가 어지러워 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보성까지 간다했는데도 ‘그럼 시간이 아깝다’고 ( 보성은 촌동네라 오전에 8시20분 출발 것 밖에 없어 보성 도착하면 거의 2시가 된다) 부득불 회천에서 차를 몰고 50분 거리의 빗길을 달려오셨다. 소년시절부터 용돈 생기면 다 불쌍한 사람 줘버렸던 그 착한 외숙부님은
여전히 타인들에게 베푸는 삶에 익숙해져 계신다.(가족들은 속이 얼마나 타셨을까?^_^)
아무튼 덕분에 편하게 비내리는 국도를 따라 회천까지 물안개 낀 몽유스런 녹차밭과 새로 생긴 해수탕이 있는 정돈된 율포 해수욕장 등을
천천히 구경하면서 12시까지 외가인 회천에 도착했다. 큰 이모님은 아픈 허리를 끌면서 너무나 맛깔난 점심을 준비하고 계셨다. 새벽에
수협공판장에서 특별히 사 오신 키조개와 쭈꾸미 등 해산물은 사랑이 담김 정성으로 더더욱 너무나 맛있었다.
배불리 먹고 보성 녹차를 한잔 음미한후 동네 마을을 둘러보면서 선산으로 올라갔다.
비 내리는 우산 산행은 참 운치있다. 쿨하게 떨어진 동백꽃송이를 밟으면서 시골의 비에 젖은 흙냄새를 맡는다.
내 기억에 어폄풋이 남아계신 외할아버지와 나를 아껴주시던 외할머니께 진한 절을 올리고 비내리는 멋진 풍경을 보면서 커피한잔을
나눴다. 과거 마루에 앉아 내가 노는 것을 보시던 외할아버지도 기억난다. 아마 초등학교때일 것이다. 외할머니는 항상 나를 위해 새벽 기도를 해주셨는데 내가 의사 생활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뵙지도 못했다. 팔을 다치신것도 정형외과 손자인 내가 관심 못갖은것은
두고두고 회한이다. 그때는 나도 참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이었다.
보성 녹차밭을 일구시는 외숙부님도 커피가 맛있다 하신다. '"나도 커피가 맛있는데 누가 녹차를 그렇게 좋아하겠어? 하하하"
개울을 지나 과거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외가로 돌아와 큰이모님과 진한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하였다.
외숙부님의 차로 보성 미력면에 들어서니 오후 5시경이다.
보성 본가에 오면 뭔가 익숙하면서도 서먹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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