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교시] 대한민국 역사왜곡의 시작은 무장독립투쟁을 '진정한 독립운동'으로 생각하고, 이씨 조선을 미화하는데 있다.
세계사에서 무장 독립 투쟁은 필연적으로 무고한 민간인 피해가 상당했음을 역사는 말한다. 무장집단은 엄청난 소비 집단이기에 경제적 기반이 없으면 강도가 되기 쉽다.
만주를 무대로 한 일제와의 무장독립투쟁은 재정 기반이 없어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일본 군경을 상대로 한 투쟁보다 한인마을을 약탈하는 '보급 투쟁' 활동의 대부분 또는 전부였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김좌진 부대의 보급 투쟁에 질린 만주 거주 조선인들은 김좌진 암살 소식에 만세를 불렀다. 불편한가?
그 당시 살았던 한국인들 다수가 이를 잘 알고 있으나 지금까지 엉터리 독립운동사 교육으로 인해 현재의 한국인들은 거의 모르고 있다.
가을만 되면 만주에 있는 한인마을에 나타나 짐승보다 못한 짓들을 한 것이 사실이다. 독립운동을 표방한 도적떼들인 것이다. 가을걷이 끝내고 먹을 것을 재어 놓으면 그들은 엽총을 메고 나타나 '독립 자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부녀자 반지부터 수수, 좁쌀까지 겨울에 양식을 쓸어가면 또 그 다음은 다른 도적떼가 독립군을 빙자해서 나타나고, 그런 도적떼를 토벌한게 그렇게 욕먹고 있는 일제다.
진실은 독립운동 한 훌륭한 분들은 못 살아남고 죽었고, 한 자리나 하려고 총질이나 해대던 도적떼들은 해방 후 총질을 못해 가난하게 산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는 그 실상을 알게 되면 부끄러움은 정상인의 몫이다.
1998년 10월 23일자 <조선일보>에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을 부상시켰으며,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여단을 사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최소 300배 이상 신화에 가까울 정도로 과장 되었다.
일본군과 싸우면 이길 확률은 10% 정도고 어쩌다 한 번 이겨도 일본군 3~4명 정도 사살하면 '혁혁한 전과'로 여겼다. 그 불굴의 정신만큼은 대단하다고 인정받아 마땅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던 <간도 특설대>는 항일독립운동을 빙자한 마적떼로부터 만주에 있는 소수민족인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몽고인, 만주족을 보호하려 생긴 조직인 것이 팩트다. 절대로 독립군과 싸우지 않았다. 진짜 독립군들은 발갱이들의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씨가 말랐다.
간도 특설대는 1938년 말, 조선인 치안유지 및 마적떼 퇴치를 위해 만들어졌다. 1943년 남만주에 팔로군이 출현하면서 만주인들과 함께 방어했다. 1932년 이후에는 만주국 치안유지가 잘 되었기 때문에 독립군 자체가 없었고, 김일성 부대(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는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인 고급장교 1명과 대위 1명이 부대를 통제하고 있었고, 부대원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며, 엘리트한 사람들이 지원을 많이 했다.
일본으로부터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고 친일매국노 세력이라 주장하는 반푼이들이 많은데, 당시 만주국에서는 일만 잘하면 많은 사람에게 훈장과 표창을 주었다. 일종의 동기유발을 위해서다.
맹목적인 민족주의 관점에서 6•25 사변 때 훌륭한 업적을 이룬 군인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일은 발갱이들의 주특기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을 모독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닌 버러지들 행동이다.
한국인 수 십만 명은 대륙 진출 해서 대륙에서 온갖 못된 짓을 자행했다. 그런데도 국사(한국사) 교과서는 한국이 마치 미국과 연합국 편에서 일본과 싸우기라도 한 것인 양, 피해자 행세까지 하며 자신들을 고난 받고 있는 성자로 둔갑시킨다.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가 80만 명이 넘고, 임시정부 광복군은 최대 339명 미만이라는 사실도 국민들에게 철저히 속인다.
➖조선인 일본군 입대 경쟁률이 평균 30:1을 넘고, 경쟁률이 62:1까지 치솟아서 일본군 자원입대에 낙방하여 자살한 사람들까지 있다.
➖거의 전 국민이 일본의 대륙침략에 열광 동조했고, 태평양전쟁의 조선인 전범만 148명이라고 말하면 대부분 믿지 않을 것이다.
가짜 국사(한국사)만 주입 세뇌 당하니 국민들은 자신들이 피해자인지 침략자인지마저 모르는 ‘기억 상실- 장님 국민’이 되었다.
일본 관련 국사(한국사) 거의 소설이고 악의적인 거짓말이다.
[교재: 대햔민국-왜 간민(奸民)에게 점령당했는가?(이윤섭), 한국의 역사조작 이념사기극(1) - 이방주]
[제 2교시] 일제시대는 현재의 북한과 과거 조선 보다도 훨씬 더 자유와 풍요를 누리던 찬란한 시대다.
➖일제시대에 끔찍하게 수탈당했다는 교육만 받아온 한국인은 믿기 힘들겠지만, 그 끔찍한 굶어 죽음과 노예에서 해방시킨 세력이 일본과 친일파다.
한국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투입한 돈은 천문학적이었다. 하지만 남•북한의 교육은 이를 철저히 감췄다.
"일제시대= 악몽시대와 착취수탈시대' 명제가 깨지게 되면 북한 김씨 왕조는 붕괴 위험에 처하며, 북한 정권을 추종해 온 남한의 김일성주체사상파인 발갱이 진영도 뿌리 채 흔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왜곡과 이념 그리고 사상으로 대중을 세뇌시켜 정신적 노예로 키우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물리적인 간첩 투입 작전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가짜 과거와 가짜 미래를 주입해서, 적진 속 내 추종세력을 만드는 수법인데, 쉽게 말해서 “나는 너희들을 끔찍한 악몽에서 구해 준 영웅이고, 미래에도 유토피아로 인도할 초인이니 나를 잘 따르고 받들어 모셔” 컨셉이다.
역사·정치·이념은 한 세트이며, 대한민국은 존경받는 극소수의 사기꾼과 사기 당하는 대다수의 용감한 바보들로 넘치는데, 그들 중 가장 쓸모 있는 바보는 자신을 정의롭다고 믿는 용맹한 바보다. 반미•반일 하는 모자란 이들을 말한다.
➖역사를 조작해서 증오심과 복수심을 유발하고 이념으로 세뇌시켜서 용맹스런 발갱이 졸개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국사(한국사) 조작과 이념 사기극, 그 전체의 큰 판을 이해하지 못하고 교과서가 가르쳐주는 국사(한국사)만 믿는다면 대한민국은 결국 발갱이가 원하는 적화통일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게 될 것이다.
황장엽의 폭로처럼, 그들은 침투·김일성장학금·포섭 등으로 학계·정치계·교육·법조·언론·문화계 등에 침투시킨 세력을 동원하여 국사 조작과 반미·반일선동 및 한일 이간질을 언제나 하고 있다.
임진왜란·늑약·밀사·강점·수탈·학살·위안부·징용·명성황후 등의 모든 국사(한국사) 중 사기 아닌 게 없다.
정치 사기꾼들의 주요 수법이 가짜 역사 세뇌로 증오심과 정의감을 유발시켜 악용하는 것이며, 달콤한 술수의 ‘이념사기’까지 동원하는데, 극단적인 국민 분열시켜 결국 평화통일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
미국·일본이 한국에게 준 돈은, 경부고속도로 200개를 만들 액수이며, 일본은 자국 총 외환보유고의 35%를 떼어서 한국에 주기도 했다.
➖그런 천문학적 지원을 받았다면 미국·일본 수준의 경제가 되어 있어야 맞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가짜 국사와 이념 사기에 속아 분열형 손실이 많았기 때문이다.
가짜 국사에 세뇌 당해서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조차 분별 못하는 국민이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으며, 그런 국민은 나라의 주인인가, 누군가의 노예인가⁉️
➖한일합방 시대의 노예 해방과 굶어 죽음에서의 해방 및 박정희 시대를 능가하는 초비약적 발전과 함께, 일본의 대륙 침략에 철저히 동조했던 침략의 공범 즉 전범지원국인 한국이다.
또한 조선이 굶어 죽은 시체들이 널려있던 나라임을 국사(한국사) 교과서는 철저히 감추고 있다.
조선 말기 까지 해마다 수 만에서 수 십만 명씩 굶어 죽었다. 조선은 동족을 자자손손 노예로 부리던 지상 유일한 노예제 나라였고, 돈을 벌어봤자 지배층에게 빼앗겨 조선 백성들은 끊임없이 굶어죽던 나라다.
그 사실은 물론, 그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국사(한국사) 교육은 말하지 않고 있다.
조선 말기는 도적떼로 들끓는 민란과 나쁜놈들의 전성시대다. 우리가 ’찬란하고 아름다운 시대‘라고 교육받는 조선시대에는 저렇게 민란과 도적떼로 들끓었다.
’끔찍한 악몽의 국치시대‘라 교육받는 일제 시대가 되자 민란과 도적떼가 거의 사라졌다. 도적떼와 민란속에서 의병과 독립투사를 구분할 방법은 없다.
➖이씨 조선의 시작은 왕(王)씨 학살부터 시작된다. 동서고금을 살펴 보더라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극이었다.
또 왕씨 성 자체를 쓰지 못하게 했다.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은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모친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라고 <태조실록> 태조 3년 4월 26일에 기록되어 있다.
왕씨를 색출해 죽이기 위해 '불고지죄'를 엄격히 실시하였다. 이 처벌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왕씨인 줄 알고 숨겨주면 사형, 혼인으로 인해 친족이 되어도 사형이었다. 이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기술한다.
그래서 살아남은 극소수 왕씨들은 성을 바꾸거나 모계 성을 따랐다. 대표적으로 바꾼 성 씨가 전(全), 전(田), 옥(玉) 씨다.
➖고종 때 인 1880년 의흥(義興) 박씨인 박응상이 왕씨로 회복하고자 상소를 올리자, 사형을 당하고 현종 때 군수를 지낸 그의 조상 박수검의 사당마저 강제로 헐렸다.
중국의 예를 보면 새로운 왕조를 연 창업군주는 전 왕조 부흥을 막기 위해 전 황제나 그 형제 혹은 가까운 촌수의 부계 친족을 죽이는 것이 전부였다. 살해 된 이는 적으면 10명 많아야 수백 명이었다. 수 문제 양견이 전 왕조의 황족을 700명 넘게 죽인 것이 가장 많은 경우다.
그런데 이성계는 성이 왕씨인 이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적어도 수 만이 넘는 백성을 학살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가족이 모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모계 성씨를 인정했기 때문에, 이씨 조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인 것이다.
대부분 노비나 평민 후손인 우리들이 극악무도한 이씨 조선을 영화와 드라마만 보고 양반 지배계급 마냥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것은, 멍청하다 못해 바보천치 수준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제 3교시] 세종대왕이 성군(聖君)이라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도 성군이다❗️ <상편 上篇>
대한민국에서는 이순신과 함께 세종 이도(李裪)가 국사(한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칭송받고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한글 창제' 다.
과연 세종은 백성을 사랑하는 훌륭한 인물일까❓
한글의 발명은 이씨 조선 4대 국왕인 세종 이도의 지독한 사대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전~~~혀 관계가 없다.
조선이 명(明)과 주고받았던 외교 문서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문서가 바로 황제와 국왕이 주체가 되어 발급하는 문서였다.
중국의 황제가 발급했던 대표적 외교 문서가 조서(詔書)와 칙서(勅書)였고,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는 국가의 국왕이 발급했던 외교 문서가 표문(表文)과 주문(奏文)이었다.
이 문서들은 양국의 군주들이 주체가 되어 생산되었던 문서였기 때문에 외교 문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명나라 초대 황제인 고황제 즉 홍무제 주원장은 이씨-조선이 보낸 표문과 전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주원장이 생트집을 잡아 '문자의 옥'(중국 역대 왕조에서 벌어졌던 숙청의 한 방식으로, 문서에 적힌 문자나 내용이 황제나 체제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하여 해당 문서를 쓴 자를 벌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은 억울하게 처벌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을 많이 일으키기는 했으나, 이씨-조선의 국서에 대한 불만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나라가 중국을 점령한 이후 대도(지금의 북경)의 한어가 표준어가 되었다. 이 한어 발음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한자음과 매우 달랐다.
그 때문에 이씨-조선 초기 작성한 표문과 전문의 한자 발음은, 주원장이 보기에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해석했다.
전통적으로 외교에서 교묘히 한문을 작성해 상대를 조롱하는 일이 많았기에 주원장이 의심할 만 했다.
이것으로 인해 이씨-조선은 명나라와 사대책봉 관계를 맺는 데 참으로 애를 먹었다. 이후로도 국서의 음운 때문에 외교 문제가 발생할 일이 자주 생겼다.
그래서 세종 이도는 외교 문제 때문에 한자음을 정확히 표기할 수 있는 발음기호를 만들려 했다. 백성과 전~혀 네~버 상관 없었다.
고대 인도의 수준 높은 음운학이 삼국시대로부터 들어왔고, 원 제국이 제정한 표음문자 '파스파 문자'도 고려에 들어왔다.
➖그래서 세종 이도는 음운학과 파스파 문자에 정통한 여러 학승의 도움으로 많은 음절을 표기할 수 있는 표음문자를 만들었다. 이 발음기호로 만든 표음문자는 한국어 표기에 적합했다. <월인석보>가 이를 증명했다.
민족주의 열풍은 20세기에 제 3세계를 휩쓸었다. 한국이 특히 심했고 지금까지 일본이 알려준 '민족'이라는 개념을 로얄티도 지불하지 않고 남발하는 중이다.
고유 문자인 '한글'은 그 뛰어난 표음 능력으로 자랑거리가 될 만 했고 '한글'은 한민족의 우수성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자랑할게 없는 조선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게 없다. 일명 '국뽕'의 더 비긴즈다.
조선의 문화영웅인 세종 이도와 '한글 신화'는 민족적 열등감에 찌든 한국인에게는 '복음'이자 성역이다.
현재 아무리 객관적인 증거를 내놓아도 '한글-신화'와 '성군 세종-신화'는 깨기 어렵게 되었다.
➖이씨-조선 시대에는 누구도 한글 전용을 주장하지 않았는데, 한자어 어휘가 많고 신분제를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일이다.
저번에 이야기 했듯이, 한국에 한글을 보급하고 부활 시킨 이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와 그의 제자인 '이노우에 가쿠고로' 그리고 조선 총독부다. 아주 불편하다 못해 G.R발광 할 수 밖에 없는 진실이다.
대부분 '반일 정신병'을 가진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서, 조선인들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한글을 가르친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 이도의 '한글 창제'가 백성을 위했다는 근거는 어디 있나❓ 그 또한 양반들을 위해 백성들에게 한글이라는 걸 만들었지 않았을까⁉️
제 4교시] 세종대왕이 성군(聖君)이라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도 성군이다❗️<중편 中篇>
세종은 스스로 고관대작의 부정을 비호했다. 대표적인 예가 조말생(趙末生)의 비리 옹호다.
본관 양주인 조말생(趙末生)은 태종 1년(1401년) 문과에 장원급제를 해서 장원에게 주어지는 종6품직 요물고 부사에 임명되었다. '요물고'는 왕실의 미곡을 관장하는 관청이다. 이후 감찰, 정언, 헌납, 이조 정랑 등 엘리트 코스를 밟고 출세길에 오른다.
조말생은 종3품인 사헌부 집의직에 있을 때인 태종 10년(1410년)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호인 대지주의 딸과 혼인했다. 조선시대판 '청춘의 덫' 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교윤리로 봐서 크게 비난 받을 일이었고, 사헌부의 관원들이 조말생과 동석을 거부할 정도였다.
태종 11년(1411년) 정월에 파면하였으나 5월에 동부승지로 복직시켰다. 태종 18년(1418년) 7월에는 이조참판으로, 8월에는 형조판서로 임명했다.
1418년 8월 세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국방부장관)로 임명했다.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권력을 놓지 않았던 이방원 태종은 중요 사안을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병조판서 조말생 세 사람과 상의할 정도로 조말생을 신임했다.
그러나 조말생은 엄청난 탐관오리였고 부끄러운 선비다.
태종 14년(1414년) 김도련(金道練)이란 자가 이 시기에 설치된 노비변정도감(조선 초기 노비소송을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관서)에 '노비소송'을 제기했는데,
당시 승정원에서 형방 대언(우부승지로 형조업무와 노비관련 소송판결 함. 대언이란 현재 수석비서관)이었던 <조말생>이 김도련에게 엄청난 뇌물을 받아 챙겼다.
➖조선시대판 '권력형 조말생 게이트'라 할 수 있다. 조선 초기 최대의 스캔들이다.
김도련은 양인 1,000여 명을 노비로 가지기 위해서 권력자들에게 노비를 뇌물로 상납했다.
노비는 ‘명’으로 안세고 ‘구’로 센다. 시체를 셀 때도 '구'라 하지 않나❓그럼 조선에서 노비는 죽은사람과 같은 대접이네.
노비 1구당 현재가치로 1,000만 원 정도 한다 하는데,1,000 구는 현재가치로 약 100억 정도의 금액이 걸린 큰 사건이다.
소송의 관한 사건의 전말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 까지 오래되고 많은 사람이 연루된 관계로 짧게 말하자면,
➖고려 말, 조선 초 함길도에 '김생'이라는 거부가 살았다. 함길도는 함경남북도에 걸친 땅인데 발해가 망한 후 거란족 등이 차지했다가 조선 초에 다시 우리 땅이 되었다. 김생은 미개척지 함길도로 이주하여 황무지 개간으로 큰 부를 이뤘다.
그러자 김도련 아버지인 김원룡이가, 자신의 도망간 노비 자식이라고 부자인 김생을 허위로 고발해 그의 재산과 노비를 빼앗고, 426명의 양인을 불법으로 노비를 만든 권력형 비리 사건이자, 아들인 김도련까지 대를 이어 소송하고, 나중에 사헌부 내사에 의해 놀라운 음모와 범죄사실이 드러나자, <조말생> 아들이며 세종시대 부마(임금의 사위)인 조선(趙璿)이, 사헌부 대사헌을 모함까지 한 악질적인 사건이다.
➖살다 살다 이렇게 복잡하고 오래 걸리며 여러 사람이 얽힌 음모가 많은 큰 사건은 처음 봤다.
이 사건에서 <조말생>이 김도련에게 증여받은 노비의 숫자는 36명으로 연루된 사람들 중 최대였다. 더욱이 조말생은 태종 연간에 승정원에 있으면서 형조의 노비 소송 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혐의가 더욱 중대했다.
액수로 따지면 당시에 뇌물 수수죄로 사형(교형)을 선고 받는 최소 한도인 80관의 9~10배인 780관에 달해 처형될 위기였으며, 실제로 대간들의 사형 요구 상소가 빗발쳤다.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 5월 13일 병오 5번째기사에서 사헌부의 사형(교형)을 권고하는 글은 이러했다.
"조말생은 본래 가난하고 신분이나 지위가 내세울 만하지 못한 사람으로, 임금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어서 부귀영달을 누렸음에도, 재물을 탐하는 데 끝이 없어서 논밭을 많이 차지하고, 나쁜짓으로 양민을 억압하여 천인을 만드는 등 못하는 일이 없었으니, 선비의 기풍을 더럽힘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사형에 처하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은, <조말생>을 사형시키지 않고 그가 받은 뇌물로 받은 노비만 몰수 했을 뿐, 다른 형벌은 주지 않았다.
➖재산도 뺏기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백성과 그 후손들은 양인이 되지 못하고 계속 노비로 남았다. 참으로 세종의 시대는, 아름답고 훌륭한 평화로운 시대였던 것이다.🤣🤣🤣
저 사건 이후로 세종 9년 1월에 황희가 좌의정이 되고 맹사성이 우의정이 된다.
황희 맹사성의 양강 체제가 되는데, 이때부터 세종의 시대가 된다. 그전까지는 세종은 태종의 그늘에 가려졌고, 신하들에 치이곤 했는데, 저 때부터 세종이 권력을 잡는 것이다.
➖태종의 사돈이자 양주 조씨 문강공파의 중시조인 <조말생>은 유배 2년 만인, 세종 10년(1428년) 4월에 풀려났다.
➖그러자 대간들은 <조말생>을 한양에 들어오지 못하게 상소를 올렸지만 실패, 세종이 복직 시키려 하자, 전원 사직 시위를 했지만 세종은 무시했다.
세종 14년(1432년), 세종은 조말생을 동지중추원사로 복직시켰다.
세종 15년(1433년), 조말생은 함길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종 17년(1435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종 18년(1436년) 세종은 조말생을 재상급아 의금부 제조에 임명했다. 대간들이 집단 사직서를 내고 20일 항의했지만, 세종은 끝까지 조말생을 비호했다.
세종 19년(1437년) 12월에는 예문관 대제학으로 임명했다.
➖세종 20년(1438년) 3월 조말생의 막내아들 조근이 문과 향시에 급제했다. 예문관 관리들이 아버지 조말생의 전과기록을 빌미로 급제자 등록을 이틀 지연시키자, 세종은 예문관 관리들을 처벌했다.
무엇보다 세종은 사형수를 비호하고 관직을 주는 것도 모자라 당시 법도 어겼다. '뇌물 받은 관리의 자식은 관리로 임용될 수 없다.'를 무시하고 조말생의 둘째 아들을 정6품 사헌부 감찰에 제수했다.
세종 21년(1439년) 세종은 조말생에게 궤장을 하사했다. '궤장'이란 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에게 하사한 안석(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다. 업적이 많은 연로한 대신에게 주는 것으로 조선땅에서 가장 큰 영광으로 여겼다.
세종 24년(1442년) 숭록대부(조선의 가장 높은 품계로, 정1품의 상계에 해당하는 품계다)가 되었다.
세종 28년(1446년) 영중추원사(무관으로 따지면 원수. 즉 이보다 더 높은 관직은 없다)가 되었다.
세종 29년(1447년) 조말생은 만 77세의 수를 누리고 죽었다. 이른바 오복을 다 누렸다.
세종이 <영중추원사>라는 관직을 새로 만들어 준 사람은 무신 최윤덕 장군이다. 그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바로 그런 자리를 사형당해 마땅한 탐관오리 <조말생>에게 세종은 몸소 주신 것이다.
인생은 머다❓조말생처럼❗️조선 최고의 탐관오리‼️
부패한 양반관료의 롤 모델이신 조말생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 수석동에 있고, 1990년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묘비에는 조말생을 찬양하는 비문이 있다. 물론 후손에 의해서.
세종은 국사(한국사)에서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데, '백성의 성군'은 아닐지라도 확실히 '부패한 양반관료'의 성군은 되셨다❗️
[제 5교시] 세종대왕이 성군(聖君)이라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도 성군이다❗️<하편 下篇>
➖2편의 세종에 대한 글을 읽으니 많이 화가 났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하편은, 백성을 위한 임금이 아니었다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해 논란을 종결 하고자 한다.
이 글을 끝으로, 세종은 애민정신을 가진 위대한 국왕이었다는 헛소리는 대한민국에서 없어지길 고대한다.
우선, 왜 이렇게 흠이 많은 세종을 위대한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성군이라 추앙할까? 생각해 본 적 있나?
당연히 없겠지. 왜 ??? 우린 오랜시간 동안 세뇌당해 좀비마냥 생각이라는 걸 안해봤으니까.
조선이라는 나라의 잔인함과 악마성 그리고 이율배반성을 숨겨야 '반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김일성의 <갓끈전술>에 의해 반미보다 반일이 쉽기 때문이다.
반드시 감추어야 하는 조선의 중대 국가 기밀은, 끝없는 민란·비적 도적떼와 공생(共生)하던 역사다.
➖조선시대에 서점과 세계지도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사람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점이 없었다.
집에서 책을 찍어서 팔거나, 직접 돌아다니며 파는 사람이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한글로 된 책을 손수 찍어서 팔았다. 이런 책을 '방각본'이라고 한다.
'방각본'은 돈을 적게 들여 만들었기 때문에 인쇄 상태와 종이의 질이 좋지 않아서 아주 싼 값에 팔 았다.
방각본을 사고팔았다는 증거는 1570년 선조 때 펴낸 <고사촬요>에 나와 있다. 책의 마지막 쪽에 이렇 게 적혀 있다.
"이 책을 사고 싶으면 수표교 아래에 있는 하한수의 집으로 찾아오시오."
이것은 일반 백성의 집에서 책을 팔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첫 기록이다.
오늘날과 같은 전문 서점이 처음 생긴 것은 언제였을까❓
그건 조선 말기 일본에 의해 소학교가 생겨 교과서를 판매할 상점이 필요했다. 😁😁😁
또 일본이다. 그 뒤 많은 출판사가 문을 열었고, 서점도 크게 발달했다. 조선시대에서 최고의 전성기는 한일합방 일제시대라는 걸 증명한다.
➖또 중국에 대한 조공 외의 무역을 한 사례도 찾기 힘들 것이다.
고려는 외국과 교류를 했기 때문에 Korea라는 국호가 세계에 알려졌고, 일본은 16세기부터 서양과 교류를 통해 발전했지만, 쿠데타로 권력을 쥔 조선 지배층은 외국과의 무역을 차단하고, 유교서적 외의 대부분의 서적을 말살하고, 농업 외의 거의 모든 산업을 억압했다.
➖그런데 작은 나라가 나라의 문을 수백 년간 걸어 잠그고, 사유재산 마저 보호해주지 않는 속에서 상공업까지 말살시키면, 그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를 우리의 교육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도 대한민국 역사책은 조선시대는 평온하게 잘 지내 온 것처럼 가르친다. 🤣🤣🤣
민중이 지배층의 도덕성을 부정할 때, 폭동이 일어나는데, 조선은 민란·폭동·도적떼가 없는 해가 없었다.
그러면 외국인이 바라본 조선의 모습은 어떠할까❓
지구상에서 조선만큼 지배층이 범죄적인 곳은 없을 것이다. [해세 바르텍]
국가는 수시로 고을 수령들에게 할당량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각 관찰사에게 할당이 되고, 사또를 거쳐, 사악한 아전들에게 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면 백성들의 집은 이 잡듯이 샅샅이 수색 된다. [제이콥 로버트 무스의 ‘1900 조선에 살다’ 중]
조선의 가장 비참한 모습 중 하나로 최하층 계급인 노비가 있는데, 100만 명에 불과한 노비가 나머지 1000만 명 이상을 먹여 살리는 구조다. 이들은 인간적인 권리나 그 어떤 소유권도 인정받지 못했고, 노비의 소유자는...…노비의 목숨을 맘대로 할 수 있다. [러시아 장교의 내가 본 조선인]
여성은 가재도구에 불과하며...…여자는 교육을 받아서는 안 되고, 남자들은 음양이라는 이원적 철학을 가지고 있어서 여성은 열등한 존재다. 딸들은 아버지에 의해 처형되고, 아내는 남편에 의해 살해된다. [비숍]
사령들은 급료가 없으므로 횡령으로만 살며, 그들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백성에게서 강탈한다. [샤를르 달레]
그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죽도록 일해서 벌어봤자 관리가 다 빼앗아 갑니다...… 당신 같으면 일할 맛 나겠습니까?” [아널드 새비지랜도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양반들은 평민에게 가혹한 폭정을 가한다. 양반들은 평민들에게서 착취, 약탈, 불법구금 등을 자행하는데, 그것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다. 관리나 수령 등의 양반들은 논이나 집을 사고도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이것은 관습이다. 조선의 가장 못된 착취 계급은 양반이다. [선교사 다블뤼의 서신]
사람들이 이런 환경에서 생존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대부분 맨발이고, 가축 우리보다도 훨씬 못한 집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고...…[알렌]
과거시험은 단 몇 시간 만에 시험과 시상식이 끝난다. 시험은 형식일 뿐이고, 관직은 비싼 돈을 내놓은 사람에게 팔린다. [헤세 바르텍]
모든 관직은 뇌물을 통해 구해야 하고, 관리들은 백성들이 굶주려도 착취를 멈추지 않는다. 이들 관리들 역시 기생충에게 피를 빨리고 있으니 바로 외척인 민비 일가였다. 가장 높은 관직도 이들로부터 사야한다...… 수백 년에 걸친 폐해를 왕은 제거할 힘이 없다. 만약 그런 시도를 한다면 왕위가 위태로울 것이다. 그러니 왕 또한...…뇌물을 탐닉하고 있었다. [헤세 바르텍]
조선의 형벌은 매우 끔찍해서 줄톱으로 다리를 켜고, 불로 지지거나, 도끼로 몸의 일부를 자르거나 했다. 사형은 너무 흔한 형벌인데, 좀도둑에게도 사형을 시킨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피해 나갈 수 있었고, 수령들은 이를 악용해서 부를 축적했다. [러시아 장교의 내가 본 조선인]
사법 조직은...… 백성을 억압·약탈하는 도구이자, 관리의 배를 채우고 사적인 복수를 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다. 수령은 판사 역할까지 겸하는데... 중요한 것은 돈의 양이다. 또 아전들은 급료를 받지 못하므로 죄인 용의자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 [헤세 바르텍 1894년 여름]
재판에서는 고위직의 소개장만 얻으면 아무리 부당한 사건이라도 이긴다. 돈을 전혀 받을 게 없는 사람이라도 힘 있는 인사에게 돈의 절반을 주기로 하면, 그가 수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고 수령은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이 경우 망설이는 수령은 세력 층에 원수를 지게 되어 자리를 잃게 된다. 조선에서 돈 없고 힘없고 정당한 권리만 있을 때 그 권리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샤를르 달레]
이씨 조선이라는 나라가 드라마, 영화처럼 예쁜 꼬까옷에 부채들면서 팔도유람하는 아름다운 나라로 생각하는가❓
백성들에게 헬-조선을 만든 시작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조선왕조에 들어 노비가 크게 형성된 데에는 세종의 역할이 컸다. 세종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박탈했다. 이후 노비는 주인의 완전한 사유 재산으로 변하였다. 노비를 함부로 죽여도 큰 죄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세종 2년(1440년) 향리와 백성이 지방관의 부정행위를 고소하면 처벌하도록 했다. 세종 때 처음 시작되어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설마❓백성을 위한 임금 세종이❓
이른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 혹은 수령고소금지법(守令告訴禁止法)이다. 경국대전의 형전편에 명확히 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향리와 백성은, 아무리 지방수령이 비행을 자행해도 고소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살인도 고소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고소는 가능하지만 범죄로 판정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지방수령이 범죄 혐의자를 고문하다 죽여도 그만인 것이다.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면, 장 100대에 도 3년의 벌을 받았다. 장 100대면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
조선의 군수는 대한민국의 군수보다 권한이 크다. 현재의 군수는 군의 행정만 처리하지만, 조선의 군수는 조세징수, 재판, 치안유지, 수사, 징병 등 모든 분야를 관장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판사, 세무서장, 경찰서장, 검사, 지방 병무청장 등을 겸직한 것이다.
이씨조선에서 부패한 군수나 현령이 얼마나 부정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위 중앙관료는 더욱 부정축재의 기회가 많았다.
➖청백리로 많이 알려진 '황희 정승'은 직권남용과 뇌물수수죄로 여러차례 걸렸지만, 세종은 역시나 대간의 탄핵을 무시하고 황희를 비호했다. 역시 양반의 성군이시니라.
이 법으로 인해 지방관의 비리를 막을 수 없다 반발하는 관료들에게 세종은 관찰사가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변명만 했다.
"수령을 고소하는 법이 지엄하기 때문에 백성이 비록 원통하고 억울하여도 호소할 수 없으므로, 수령이 두려워하지 않고 꺼릴 것이 없어서 뇌물과 범죄 은닉이 빈번합니다. 백성에게 돈을 마구 거두어 자기 주머니에 채우니 백성들이 불안하여 서로 원망을 품고 있습니다."
🟥 …라는 상소를 올려도 백성을 무시한 자가 우리들이 그리 물고 빠는 <세종대왕의 참 모습>이다.
➖지방수령들은 한양 권세가에게도, 자신의 근무평가를 매기는 관찰사에게도 많은 뇌물을 뿌렸다. 그리고 관찰사들은 승진을 위해 한양의 권세가에게 뇌물을 상납하는 악순한이 반복된다. 이게 바로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이씨 조선의 모습이고, 세종이란 임금이 대놓고 이렇게 하는 법을 만든 것이다.
지방수령의 비리를 고발할 수 없게 된 향리와 아전은 탐관오리 수령에 영합해 자신의 잇속을 챙겼다. 당연히 백성들만 죽어났다.
이것이 백성을 위한 정치인가❓
대한민국에서 '세종이 위대하다'는 말은 정신병이다❗
<부민고소금지법>은 지방수령이 알아서 부정축재하라고 공식적인 허가를 내 준 것이다. 누가??? 백성을 위한다는 세종대왕이
“아버지 태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한편, 비(여종)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을 양인 신분으로 삼았다. 아들 세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방임했으며, 비(여종)와 양인 남자의 소생을 노비 신분으로 돌렸다.”
세종 시대(15세기) 한성 인구의 약 4분의 3이 노비였다고 한다. 특히 세종의 왕자인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이 거느린 노비의 수만 1만명에 달했다. 세종 14년(1432년)에 제정된 ‘종모위천법’도 노비의 양산을 가져왔다.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만 놓고 보면 태종이 더 박해를 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노비와 양인이 결혼을 하면 노비가 증가할 수밖에 없고, 태종은 이를 막았던 것이다. 아울러 태종은 비(여종)가 양인 남자와 결혼을 하면 그 자식은 아버지의 신분인 양인의 신분을 인정해줬다. 자식은 노비가 아닌 양인이다.
➖반면 세종은 노비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결혼을 해서 낳은 자식도 ‘노예’로 만들었다.
🟥 이렇다 보니 양반들의 재산인 노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기득권 양반들에게 재산을 늘려주니 '양반의 성군' 임에는 틀림없다.
➖세종 시대는 기생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세종은 1431년 관비가 양인 남성과 낳은 자식 중 딸은 기생, 아들은 관노로 삼자는 형조의 건의를 수락했다.
🟥 또 1437년에는 국경지대의 군사를 위로할 목적으로 기생을 두라는 지시도 내렸다. 위안부의 시초는 세종이다. 😂
윤미향과 종북세력 그리고 반일정신병자들은 임금 세종을 욕해라. 일본군은 돈이라도 줬고 인격체로 대해 줬다.
세종은 하늘에 올리는 제사인 천제를 중국 천자의 예에 속한다며 폐지해 사대주의의 길을 스스로 걷기도 했다.
자, 3편에 걸쳐 임금 세종이 백성을 위하는 성군이 아님을 증명했다. 부족한가⁉️
만일 성군이라 우긴다면 어쩔 수 없다. 정신병자를 설득할 정상인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
🟥 세종은 애민정신을 가진 '하늘이 내리신 성군'이 아니라, 왕 자리 보존에 연연해 하는 단지 똑똑하고 비겁한 '양반을 위한 임금' 일 뿐이다.
그는 중국식 전제군주정을 꿈꾸었으나 한계를 인정하고 양반들의 지지를 얻어 왕조의 존속을 영구화하려 했다. 그의 정책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착취•수탈 사회)를 만들어 양반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다.
➖세종은 양반의 재산인 사노비를 늘리고 노비들의 면천 가능성을 없애는 양반의 특권강화와 보장하는 정책을 편 것이 팩트다.
특히 임신한 공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줘서 세종대왕님이 백성을 위하시는구나 하며 감동을 받는 대부분 모지리들은 들어라.
이 역시 노비를 늘리려는 꼼수다. 아버지 태종과 다르게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허용한 것이 그 태어난 자식을 노비를 늘리려 한 것이다. 세종의 아들 중 15남 영응대군은 노비 수가 1만이 넘었다.
이는 전형적인 노예제 사회였던 남북전쟁 이전 미국 남부의 농장주가 보유한 노예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이들은 보통 80~90 명 정도의 노예를 소유했고 100아 이상은 아주 드물었다.
몇 가지 일화를 들어 세종이 백성을 위했다는 멍청한 그 입을 다물라.
조선왕조 500년 동안 양반가에서 노비를 고문하고 죽이는 일은 흔했고, 산과 들에 버려진 노비의 시체를 보는 것 또한 흔했다. 이 모든 시작점은 우리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세종대왕님 작품인 것이다.
일제와 을사오적을 욕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조선의 잔인함과 참혹함을 이야기 하고 비판하는 것이 순서고 순리이며 예의다. 사람이라면…
[제 6교시] 🔵 우파보수와 운동권 출신 후배와의 대화를 통해 배워 봅시다❗️
후배 : “아이 ~ 형은 왜 자꾸 ‘수구x’ 들과 똑같은 얘기만 해요?”
🔵: “너는 지금도 여전히 좌파야?”
후배: “좌파가 아니라 진보죠. 노동자와 서민의 편에 서는 세력이니까.”
🔵: “노동자와 서민의 편이라... 당연히 그래야지. 기업은 가진 자인데 노동자와 서민의 편, 못가진 자의 편에 서야 옳지. 그러니까... 기업에게 강제력을 가해서라도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 주고, 세금을 인상해서 서민 복지도 향상 시켜야 맞는 거지?”
후배 : “당연하죠. 그래서 투쟁하는 거잖아요? 임금이 올라야 일 할 맛도 나고, 노동자가 살아야 경기도 나아지고, 복지가 향상돼야 사회도 좋아지죠. 가진 자의 편에 선 수구 들이 가로막는 거고.”
🔵: “그렇지, 서민과 노동자를 위한 정책이 돼야지."
“그런데 말야…그렇게 서민과 노동자를 위해주려고 기업에게 그런 불이익을 주면 기업 하겠다는 사람은 많아질까, 줄어들까?”
후배 : "그야 뭐 줄어들겠죠?“
🔵: “또 해외 자본의 국내 투자는 많아질까, 줄어들까?”
후배 : “뭐 쪼끔.... 줄어들 수도 있고...."
🔵: “기업 세금을 올리면 해외로 튀는 기업은 많아질까, 줄어들까?"
후배: “음.... 쪼금.... 많아질 거.... 같기도 하고....”
🔵: "국내외 자본의 투자가 줄어들면 일자리는 많아질까, 줄어들까?"
후배: “뭐....약간....줄어들....수도....!”
🔵: “일자리를 줄이면서 노동자 편에 선다? 복지 많이 해준다? 이상하지 않아? 또 일자리가 줄면 임금은 올라갈까, 내려갈까?”
후배: “음... 쪼끔.... 내려.... 갈려나?”
🔵: “와 너 진짜 똑똑하다. 경제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잖아? 너 그리 똑똑한데 왜 여태 좌파니? 너 정도면 진작 빠져 나왔어야지.
후배: “어쨌든요 서민과 세입자의 편에 서야 하는 건 맞잖아요?”
🔵: “맞아, 서민과 세입자 편에 서야지. 그러니까 임대료도 확 낮추고, 집 주인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서 세입자를 도와주면 좋은 정책이지?”
후배 : “당연하죠. 정책이란 못가진 자의 편에 서야 맞는 거죠.”
🔵: "맞아, 당연히 못가진 자의 편에 서야지. 그런데.... 세입자의 편에 서 주려고 집주인에게 그런 불이익을 가하면, 집을 공급하는 사람은 많아질까, 줄어들까?"
후배: "공급이야 뭐.... 줄어들 수도.... 있고....”
🔵: “공급이 줄어들면 집값, 전·월셋값은 올라갈까 내려갈까?”
후배: “음....쪼끔......올라......가려나?”
🔵: “와...너 정말 똑똑하다. 세입자의 편에 서면 되려 그들을 해칠 수 있는 이치까지 이해하잖아?
좌파가 그런 거 이해 못해서 항상 집값과 전·월세 값을 폭등시키는데, 대통령도 이해 못하는 어려운 이치를 너는 정확히 이해하잖아? 와... 너 그리 똑똑한데 왜 여태 좌파야?”
후배: “어쨌든요, 노동자의 편·비정규직 편에 서야 하는 건 맞잖아요?”
🔵: “물론 노동자의 편에 서야지. 그러니까 비정규직도 정규직화 시키고 파업 노동자의 편,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말이지?”
후배 : “당연하죠. 요즘 비정규직이 얼마나 많은데....”
🔵: “그래 비정규직 편에 서야지. 그런데 말야. 임금으로 지출될 돈은 한계가 있는데,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시키고, 고임금의 파업 노동자 편에 서고, 특정 부류의 임금을 올리면, 그 정규직이 못 된 사람들, 취업 못한 청년들에게 돌아갈 몫은 줄어들지 않을까?
오히려 청년 실업자와 노동 약자를 더 망치게 되진 않을까?
한정된 파이를 가지고 누군가에게 더 주면 그로 인해 손해 보는 ‘더 약자’를 만들어서 오히려 약자를 망치게 되지는 않을까?
‘노동자와 서민의 편’, ‘약자의 편’이라, 참 멋있고 정의로와 보이지? 하지만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
오히려 기업 편에 서서 기업 활성화를 돕고 일자리 창출할 여건을 키워주면서 파이를 키워 가는 게 진정 약자를 위하는 길 아닐까?”
후배: “그러니까...잠깐만요...자 잠깐 화장실...!!!”
(화장실 다녀온 후 급한 연락이 왔다면서 황급히 나감)
[제 7교시]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지상 유일의 노예제 나라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이씨-조선을 빗댄 말이다.
김옥균은 조선은 지옥보다 더 나쁜 곳이라고 했다. 지옥은 법에 따라 심판받지만 조선에서는 이유 없이 고문하고 죽이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가장 천한 신분은 8천(賤)인데, 노비·승려·무당·광대·상여꾼·기생·공장·백정이며, 천민들은 어린 아이에게조차 머리 숙여 소인이라 해야 했고, 옷차림도 천해야만 했다. 여기서 공장이란, 수공업에 종사하던 장인을 일컫는다. 조선이 얼마나 상공업을 천시해 가난의 나라로 가기 시작했는지 알 수 있다.
➖20세기 초까지도 '백정 각시타기'라는 놀음이 있었다.
<백정각시타기>란 백정 가족중 여성을 개처럼 바닥에 엎드리고 그 등을 타는 것인데 그 상태로 마을 한바퀴를 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당한 여성 백정은 당연히 심각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심한 경우 여성백정을 알몸인 상태로 백정각시 시킨 경우도 있었다.
일제시대 초 한 백정의 아내가 그런 능욕을 당한 후 자살하는 일도 있었는데, 딸의 소학교 운동회를 보러갔던 어머니가 딸앞에서 백정각시놀음을 당해서 딸이 보는 앞에서 입에 제갈이 물려지고 남자들이 올라타 온갖 모욕을 줬던거다. 결국 그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자살을 하고 만다.
이런 이야기는 박경리 소설 <토지>에도 나온다.
"구경꾼 속에서 백정이 딸 하나를 잡아낸 기라요. 한사 결단 달아날라는 거를, 아 그러씨 장정 몇이 덤비는 데야,치마가 찢기 달아나고 속곳이 벗겨지고,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고놈의 가시나 몸매도 좋고 얼굴도 이삐게 잘 생깄더마'"볼 만했겄네""그 이삔 가시나를 엎어뜨리놓고 장정들이 번갈아서 올라타고 이랴! 이놈의 소가 와 안가노!함시로 엉덩이를 철벅철벅 때리는 기라요.뿐이겄소?목에다 새끼줄을 걸고 네 발로 기게 하고 구경꾼 앞을 돌아댕기는데,그 에미가 소개기를 가져와서 겨우 풀리났지마는 좀 안된 생각도 들고,""안되기는 머가 안됐단 말이오?백정은 사람이 아닌께,그놈들을 오냐오냐 하고 내버려두었다가는 칼 들고 소만 잡겄소? 사람도 잡을라 들 긴데 옴작달삭 못하게 콱 기를 지이놔야지."
물론 '백정각시놀음' 없었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을 들여다 보자. 대충 예상이 되지 않나? 과연 없었을까? 실제는 그 이상이다 보니 현실부정 하는 건 아닐까?
➖조선 500년은 99%의 인민이 1% 정복자의 노예로 굶어죽던 세월이며, 그 속에서 인민들은 ‘노예제’ 사회의 지배층을 몰아내기 위해 동병상련으로 뭉쳤어야 했다.
🟥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자기보다 약자를 괴롭히고 천대했다. 현재 한국인들 모습에서 조선인들의 모습이 보이는 건 비약일까?
대한민국은 쓰레기 같은 조선인의 습성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대화나 설득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고 조선인들과 발갱이들은 몽둥이가 약이다.
➖프랑스인이 프랑스 장관에게 보내는 조선의 노비제도 보고서에서 조선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장관님...제가 보고 드리는 조선의 노비(奴婢) 제도가 장관님 의 관심을 끌리라고 생각합니다...조선 각지에 주기적으로 가뭄이 발생할 때 대규모로 여자와 여자 아이들의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가장이 양도하는 경우 외에도 노름에 져서 빚을 갚을 방법이 없어 남자가 자기 부인을 채무자에게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노비는 죽을 때까지...심한 노역을 강요당합니다...
때리기도 합니다. 노비를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죽인다 해도 처벌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노비는 아무리 심한 대우를 받아도 주인을 고소할 권리가 없으며, 배상금을 지불하거나 방면을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혼자 다니는 여자는 처음 만난 남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관아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습니다...
주인은 하인들 중 한 명을 선택해 자신이 소유하는 여자 노비와 짝을 지어 줍니다. 또 남편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이 흉측한 제도는 인간을 동물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법으로 노비의 남편을 주인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허락함으로써 비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이곳에서 여자는 열등한 인간입니다. 여자는 이름도 없습니다. 동물보다 조금 나은 노비에게 신경을 쓸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가장 지식인이라고 존경받는 사람들조차 이러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역죄가 발각되면 가담자들 모두 부모, 외조부, 장인, 아들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지고, 딸과 부인은 모두 관아의 노비가 됩니다...
한국은 야만적이어서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현재의 관습을 버리고 문명화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상하기 힘듭니다..."
[외무부장관 스플리 각하께 콜랭 드 플랑시 1890년 3월14]
🟥 최악의 신분제 나라라는 인도조차 동족을 사고 팔진 않았는데, 조선의 노비(奴婢)는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자 가축에 불과했고, 주인이 죽이거나 가혹행위를 할 수 있었다. 16~17세기경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다.
노비는 1894년에 갑오개혁 후에도 제대로 사라지지 않다가, 한일합방 후에야 사라졌고, 6.25 후에야 관습적 차별까지 사라졌다.
한국사 교과서는 조선후기 신분제가 붕괴되었다며 양반이 절반을 넘었다고 가르치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호적에 등재된 유학(幼學)을 왜곡한 것이다. 유학에는 서얼과 중인 및 족보를 위조한 그룹이 대거 포함되어 있고,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족보 위조가 아니라, 관직, 토지, 노비, 기존 양반들과의 관습적 친분, 혈연 등의 요소가 필요했다.
➖사회적 '양반인정'이 선행되어야 양반으로 행세할 수 있었으므로, 양반은 이사조차 함부로 갈 수 없었고, 지배층으로서 권세를 가진 양반은 극소수였다.
➖한국인 모두는 자신을 양반의 후손으로 알고, 국민의 절반이 왕족 성씨인 코미디 나라인데, 족보의 대부분은 일본 통치 시대에 조작된 것이며, 성이 없었던 백성들에게 김이박 등 왕족 성씨를 부여한 것도 일본이다.
🟦 '전 국민의 양반화', '국민 절반의 왕족화'는 일본 통치 시대에 이루어졌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이씨-조선은 북한보다도 더 최악인 나라다.
조선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1인 통치다. 조선의 법률 체계는 왕은 백성의 아버지이며 지배자라는 관념 위에 세워져있다. 때문에 모든 관리는 왕의 마음에 들려고만 노력한다. 한 사람의 권력자가 전체를 지배하면 어떤 해악이 만연하는가는 이곳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제이콥 로버드 무스]
➖당과 수령이 법보다 위인 북한 체제와 똑같다. 해악도 같다.
토지소유권은 인정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왕의 소유이며 경작지를 팔더라도 토지 이용권만을 파는 것이다. [내가 본 조선인]
➖중국식 공산주의다.
러시아 한인촌을 방문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 민중은 관리들에게 착취당하지 않으려고 꾀를 내다 못해 부자가 되기를 포기했고, 그래서 게을러진 것뿐이었다.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도 어차피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체념은 조선인들을 더욱 가난으로 몰아넣었다. [비숍,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1897]
➖가난과 몰락의 이유는, 사유재산권 보장이 없는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되고, 관리들의 억압과 착취, 무능한 정부 탓에 있던 산업마저 사라져버렸기에 북한과 비슷하다.
➖조선과 북한의 공통점은 기업이 성장할 토양을 말살해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거의 ‘공산주의 국가’였다. 백성들은 굶어 죽고, 이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면, 개인이 애써 모은 재산을 빼앗기지 않을 자유라도 주거나, 상공업만 진흥 시켰어도 굶어죽음은 사라졌을 것인데, 세종대왕은 김정일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었다. 물론 지배층 관점에서는 성군이다.
네덜란드의 핸드릭 하멜이 '조선 왕국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들은 훔치고, 거짓말하고, 사기 치는 습성이 강해서 그들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너무 단순해서 쉽게 속는다. 조선인들은 유약한 민족이며 강직함이나 용기가 없다. 그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랑인 양 우쭐댄다."
설마 이 글을 읽고도 느끼는게 없는가? 소름돋게 지금의 한국인들과 비슷해 부끄럽다. 난 조선인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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