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확률과 통계
동전을 던진다.
앞면이 나올 확률은 1/2.
수 없이 던지다 보면 언젠가는 0.5의 확률로 수렴하겠지만
단 두 번의 기회에 어김없이 정확히
앞면 한 번, 뒷면 한 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주사위를 던지면,
숫자 6이 나올 확률은 1/6.
확률은 그렇다지만
내가 아무리 애를 쓰고 기도하며 던진들
여섯 번에 한 번을 빠짐없이 꼬박꼬박
내가 원하는 숫자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당구를 쳐 보자.
잘하면 넣을 수 있는 공이지만 잘 안 될 수도 있다.
웬만하면 잘 넣던 각도의 공이지만
그 날따라 이상하게 안 풀리는 날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지만
‘후루꾸’로 들어가서 역전을 안겨주는 날도 있다.
평소 300, 500을 치던 사람도
모든 공을 매번 똑같이 치거나
매일 어김없이 같은 점수를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대체로 그러하지만, 분명히 안 되기도 하는 것들을
우리는 ‘확률’, 그리고 ‘가능성’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2. 천벌로 죽는 사람들
500년 전, 충수돌기염(맹장염)은
아마도 대부분 죽는 병이었을 것이다.
뒷집 아무개가 며칠 배가 아프더니 열병으로 죽었대,
300년 전, 뇌수막염 역시
아마도 거의 다 죽는 병이었을 것이다.
옆집 개똥이가 머리가 아프다더니 열병으로 죽었대,
그 시절,
패혈증이나 뇌출혈은 아마도 반드시 죽었겠지.
건넛마을 갓난 아이가, 대장간집 김씨 아재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었더래.
치료는 고사하고 진단명도 원인도 모르던 시절,
사람들은 그것을 천벌이고 팔자이며 업보라고 했다.
3. 무능하고 느슨한 의사 이야기
나는 한 번 출근할 때
40명에서 80명 정도의 환자를 보는데,
현대의학의 정확도가 90%라고 치고,
내가 그 중 가장 뛰어난 의사라고 가정하더라도
나는 아마 매 진료 때마다 4명 내지는 8명의 환자에게
무언가 완벽하지 않은 진료와 처방을 할 것이다.
심지어 내가 보는 환자들은 어린 아이들이고
응급실에서의 진료란 대개 5분 안에
환자의 전신상태를 신속히 판단해야 하는데
나는 현 시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약과 기구들을 다 활용할 수도 없다.
그러니 정확도는 더 떨어지겠지.
솔직히 말하면,
세상이 원하는 ‘과실없는’ 진료를 하는 방법은
사실 대단히 쉽고 빠르고 간단하며 안전하기까지 하다.
배가 아파서 온 아이에게 처음부터
연령으로 인한 방사능의 위험과
아이가 반복해서 겪어야 할 검사 과정의 두려움과 통증,
부모와 나라가 지출하게 될 의료 비용 등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볼 수 있는 숫자의 환자만 받아 보면서
모든 종류의 영상의학적 검사와 혈액검사,
부작용이 가장 없을 최소한의 수액과 약만 쓰며
반드시 모두 입원을 시키고
아이가 아파한다고 표현하는 모든 순간마다 재검을 하되
심지어 증상이 호전되어 퇴원을 앞둔 상황에서조차
퇴원 직전 CT를 찍어 눈으로 끝까지 확인하면 된다.
그러면 내 손에서 퇴원하는 시점까지의 아이는
최소한 안전할 수 있겠지.
얼마나 많은 환자가 병원을 찾아 길바닥을 헤메든
아이들이 방사능에 얼마나 노출되거나
하루에 몇 번을 찔러 혈액검사를 되풀이하든
병원비가 얼마가 나오며
심평원이 삭감을 하든말든.
그러나 나는
구토가 심해 응급실로 와 초기에 탈수가 있던 아이라도
여간해서는 굳이 퇴원 전 혈액검사를 다시 하지 않는다.
아이 혈색이 좋아지고, 구토가 멎어 잘 먹기 시작하고,
소변을 잘 보기 시작했다면
굳이 아이를 또 찔러 탈수가 교정되었는지 볼 이유가
대개는 없기 때문에.
배가 아파서 온 아이도 수액과 약을 주고 관찰하다가
증상과 전신상태가 호전되고
진찰에 특별한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면
굳이 초음파를 다시 권하거나 CT를 또 찍지 않고
경과를 보다가 그대로 퇴원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 다소 질병이 진행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보호자나 형제자매의 사정으로 절대 입원이 어렵다 하면
전후사정과 병원 접근성을 확인해
근처 병원에서 진료를 연계하도록 하고
위험할 수 있는 증상에 대해 교육한 뒤
이상이 있으면 바로 다시 오시라 집으로 보내기도 한다.
우리의 진료 상황은 100% 이상적일 수 없으며
100명의 환자는 100가지 모양으로 다 다르므로
나의 의학적 판단은
100% 교과서적으로 완벽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법적으로 허술하고 해이한 의사다.
4. 고라니를 피하는 열가지 방법
‘의료사고’라고 표현되는 많은 사건들에 있어
의료인이 아닌 사람들과 언론, 법률은
마치 환한 대낮에 멀쩡히 횡단보도를 건너던 사람을
의사들이 일부러 과속을 하고
음주 운전을 해서 죽인 것처럼 표현하지만
현장에서의 의료란 차라리
불 꺼진 산길을 더듬어 가는 동안
불쑥 튀어나오는 고라니를 피하는 일에 가깝다.
소아나 임산부의 충수돌기란
비오는 밤에 검은 우비를 입고
왕복 16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미친놈과도 같이
그 모양도 위치도 가늠이 잘 안 된다.
확률이 70%라는 건
니가 운전을 잘 하는 상위 30%였다면
무조건 피할 수 있었을 일을
니가 31%의 실력없는 운전자였기 때문에 죽인 게 아니라
누가 운전을 했건 정상적인 운전 면허를 가진 사람이
일반적인 운전 상의 주의를 기울였을 때
30%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도
사고를 피하기 어려웠을거란 뜻이다.
그리고 그 30%가 처한 현실에서의 선택은
빈 도로에 튀어나온 고라니를 치지 않기 위해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을 것인가,
왼쪽으로 꺾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왼쪽에서 고라니가 튀어나오고
오른쪽에는 절벽이 있는데
급커브 도로를 앞에 둔 채로
뒤에는 다른 차가 따라오고 있는 상황에 가깝다.
핸들을 어느 쪽으로 꺾을지, 꺾을지 말지,
차를 세울지, 그대로 돌진할지,
다 지나고 한가하게 CCTV 보며 판단하는 건 쉽지.
여기 왼쪽 60도 각도에 빈 공간이 있었네,
전방주시를 더 철저히 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텐데,
너의 판단과 반응 속도가 더 빨랐다면
고라니는 살 수 있었을텐데.
그러니 실력 없는 너는 감옥에 가야겠다.
5. 불멸의 인간
모든 인간은 죽는다.
우리가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모든 사람은 어느 순간에 어떠한 이유로 반드시 죽는다.
사람의 목숨이란 알면 알수록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어서
아무리 애를 쓰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도
하루아침에 스러져버리는가 하면
이 상황을 견디고 살아내는구나,
경이롭고 숭고할 만큼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의료의 역할은 그 과정을 가능한 한 돌이켜 보고
주어진 상태에서 최대한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고,
가급적 덜 상한 상태로 사람의 몸을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다.
수백년 전 살아날 확률이 0%인 병이
현대에 살릴 확률이 30%가 되었다면
의사들이 10번 시도할 때 여전히 일곱명은 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현대의학이 70%의 유효성과 능력을 가졌다면
아무리 유능한 의사와 팀이 무슨 짓을 해도
30%의 환자나 질병은 구할 수 없다.
어떠한 행위에 100%의 결과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치료가 아니라 종교나 구원의 능력에 가깝다.
의사들은 무작위로 주어진 상황에서
내 손에 쓸 수 있는 현실적인 팀과 약재와 기구를 가지고
그 시점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한 환자에게 동시에 발생하는 질병은
단 하나의 진단명으로 정리되어
가장 적절한 하나의 치료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애초에 여러 증상들의 선후관계조차 모호할 때가 많다.
그러니 모든 행위에는 선택과 한계가 있고
치료행위는 언제나 환자에게 득과 실이 동시에 가해지며
결과는 절대로 언제나 반드시 최선일 수는 없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어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모두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했어도 결과는 나쁠 수 있다.
1%의 가능성에 대해서라도 내 가족을 살리고 싶다면
의료진들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99%의 확률로 살리지 못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6. 담장 위를 걷다, 혹은 달아나다
현대의학과 공중위생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는 이제 사람이 왜 죽는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더 살려낼 수 있는지
대략은 알게 되었지만,
나쁜 짓을 했으니 천벌을 받아 죽었다는 것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한 우리 사회의 무의식은
나쁜 짓을 안 했는데 죽었으니
안 죽어야 하는데 아무튼 죽었으니
그렇다면 손을 댄 그 놈이 나쁜 짓을 했겠구나!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나는 오늘도 평소처럼 일터로 나가고
아직은 아마도 내가 배운대로 일 할테지만
이런 판결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는 아마도 조금씩 더 비겁하게 용기를 잃을 것이다.
길에 쓰러진 이를 도와주려던 선한 의도의 보통 사람들을
자꾸 성추행범이나 강도 취급하며
의도를 의심하고 결과에 책임을 묻고 배상 운운하면
그 사회는 점점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내가 도울 수 없는 일이라고 몸을 사리는 곳이 된다.
병원에서 치료받다 결과가 나쁘면 의사를 탓해 왔는데,
중환을 볼 의사들이 사라지면 그건 누구의 잘못일까.
그렇게 우리 사회는 10% 가능성의 환자를,
30% 가능성의 환자를,
이제는 70% 가능성의 환자까지도 잃어가고 있다.
이 비극은 과연 몇 퍼센트에서 끝날까.
Allison 님글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긍정적으로 살아 갈 수 밖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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