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오늘, 정전협정으로 비극적인 전쟁은 휴전에 들어갔다. 사진에 보듯 한글판 정전협정문은 당시로는 드물게 타자기로 인쇄되었다. 이 한글 타자기는 공병우 타자기로, 여기에도 좌우대립의 아픈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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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레닌의 지원금을 둘러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분으로 독립군이 전멸한다(자유시 참변). 이 사태에 항의하러 이동휘는 언어천재 이극로를 데리고 레닌을 만난다. 레닌은 진상규명을 추진하지만 1922년 김구는 이동휘의 심복 김립을 암살한다. 식민지 상태에서 이미 '대한민국'의 이념대립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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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는 돌아오는 길에 베를린대학에 남아 경제학 박사를 받는다. 언어학을 부전공했던 그는 스스로 베를린대학에 조선어학과를 창설하여 강의하고,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만든다. 가로쓰기 등 현대 한국어의 거의 모든 틀을 마련한 그는 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중 해방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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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말모이(2019).’ 영화 초반에 서울역에 도착하는 윤계상이 바로 베를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이극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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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는 눈병으로 고생하다 조선어학회 건물 옆에 조선 최초로 생긴 안과 전문 병원 공안과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이때 이극로의 한글 열정에 감동받은 의사 공병우는 한글기계화에 인생을 걸게 된다. 공병우는 이극로의 조언으로 한글타자기를 완성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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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바뀐 것은 6.25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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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중 해군제독 손원일 장군은 문서 작성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공병우를 불러 타자기를 한국군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한글 가로쓰기가 일반화되고, 공문서의 국한문 혼용은 한글 전용으로 급속히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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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UN, 북한, 중국이었기에 협정문은 영문, 한국문, 중국문 세 가지 언어로 작성했다. 그런데 북한은 당시 한글 타자기가 없었다. 때문에 UN군은 한국군의 공병우 타자기로 북한을 위해 한국어 정전협정문을 인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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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공병우를 한글 타자기로 이끌었던 이극로, 그리고 초기 한글 연구를 주도한 주시경의 수제자 김두봉 두 사람은 이미 월북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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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휴전 협정 당시 북한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이었던 한글 학자 김두봉은 공병우가 만든 한글타자기로 작성된 이 문서에 김일성이 서명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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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공병우의 타자기를 도입한 손원일 제독의 아버지는 손정도 목사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김일성의 부모와 둘도 없는 친구였던 손 목사는 부모를 잃고 방황하던 어린 김일성을 거두어 키우게 된다. 여기서 김일성은 3살 위 손원일을 만나고, 같은 또래인 손원일의 동생 손원태, 손인실과 친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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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메이퀸이었던 손인실은 1930년대에는 빙상 선수로 유명했다. 70년대 적십자 회담에서 남한대표단에게 김일성은 손인실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 후에도 두 사람의 소식을 찾다가 마침내 1991년 미국에서 의사로 있던 손원태와 연락이 되자, 평양으로 초청했고, 그 후 둘은 매년 평양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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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한다. 김정일은 상 중임에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8월 손원태의 80회 생일잔치를 평양에서 열었고, 그해 손원일의 아들 손명원 쌍용 사장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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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사망한 손원일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1999년 사망한 손인실은 뉴욕에, 2004년 사망한 손원태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손정도 목사의 세 남매는 모두 다른 나라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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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평생 한글기계화에 앞장 섰던 안과 의사 공병우는 말년에 서울대 기계과 학생이던 이찬진을 지원하여 '아래아한글'이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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