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해외에서 몇 달 살아보는 것>이다. 물론 1970년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선친의 은행 근무지를 따라 일본 오사카에서 3년을 살아봤지만 어릴 때라 바나나, 귤 등을 원 없이 먹었다는 것 말고는 특별히 기억은 없다. 대학에서 근무하는 선후배 동기들이 해외 연수를 다녀오는 것을 보면서 부러워하면서 살아온 지 십 수년째인데 산부인과 원장 친구가 급성 간염 후 수 개월 만에 간이식 합병증으로 저세상 사람이 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떠난 똑똑한 친구들을 생각하면 사실 나도 이미 넘치게 많이 받았으니 말이다.
조건은 간단했다. 아내의 직장 문제로 혼자 가니 학군과 관계없이 소도시로 가고 첨단 수술법을 새삼 배울 필요는 없으니 미국의 병원에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었다. 결국 대자연이 충분하고 state tax가 없어 거주비가 저렴한 Oregon state의 Corvallis city에 있는 오레곤 주립 대학(OSU)으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교수직으로 있는 친구는 심심할 것이라 말렸는데 동료교수의 연구 과정을 전해 듣고 흔쾌히 결정했다. 그 동료의 project와 비교해서 내가 갖고 있는 몇 개의 발명특허가 더 가치가 있을 듯싶어서였다. 나도 이곳의 대학 교수와 공동 연구를 하고 싶었다. 물론 미리 약속된 것은 아니었지만 직감적으로 왠지 가능성이 느껴졌다.
(비가 오다 갑자기 하늘이 푸르게 변하길 하루 종일 반복 한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 서류 제출 면접 및 심사 등등 ) 오레곤 주립 대학 (College of Public Health and Human Sciences, Oregon State University)의 방문 교수의 자격으로 4월 9일 드디어 미국에 도착했다. Oregon의 포틀랜드 공항에 도착해서 대학이 있는 Corvallis시 까지 버스로 2시간 가까이 달렸다. 끝없이 푸른 숲이 펼쳐졌다. 2시간 전 비행기 갈아 탈 때의 LA 푸른 하늘은 온데 간데 없이 이곳은 먹구름이 비와 함께하는 완전히 다른 기후였다. (이런 gray 하늘이니 green 땅이 유지되는 것이겠지. 그럼 LA는 green 하늘이니 gray 땅? 하나를 잃으면 다른 것을 얻는 법이다.) 마음이 차분해지니 내게는 오히려 좋았다. ( 최대한 긍정 마인드로 시작하자.)
집은 3개월 전 답사하면서 봐둔 집들 중에서 먼저 나온 집으로 무조건 정했다. 대학 교수의 연수 스케줄대로 2월경으로 시작했으면 집과 모든 가구 등을 한꺼번에 구입할 수 있겠지만 개업의사로서 (장기 대진의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별 이상한 경험도 했다. 의사라고 다 같은 수준의 의사는 아닌 것 같다.) 6개월의 단기(?) 연수이기에 내게 적합한 기간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D-day는 4월 초다. 이 기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2년의 가치로 승화시킬 각오로 도착 다음날 바로 대학 사무실에 가서 신분증을 발급받고 해당 학과의 교수 및 대학원생들과 인사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난 어느 누구보다도 멋지게 생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나는 목말라 있었다.
( 학교 교정의 나무들이 거의 국립공원 수준들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평범한 쇼핑센터들이 있어서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구입했고 큰 것( TV, 침대, 탁자 등) 은 친구의 트럭을 이용해 IKEA 와 Costco에서 구입했다. 또한 중고물품을 파는 곳(Good Will)도 자주 가서 득템 했었다. 혼자 사는 기쁨을 만끽하려고 운전면허를 따고 차량도 푸른색의 Honda Coupe 로 구입했다. 중고차량 구입까지 약 2주일이 걸렸는데 그 동안 24시간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는 Corvallis 시내 거리를 여행용 작은 가방을 끌고 다니면서 시장을 봤더니 마음이 우울해지고 답답했었다. 그러다 차 구입한 후 바로 끝없는 지평선위의 도로를 마음껏 달리니 순간 밝은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넓은 대자연에 비쳐지는 내 꿈을 방대하게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 절대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갈 일은 없다.) 이곳 대중 버스는 무료로 배차 간격이 약30분인데 기타 어느 차도 빵빵 거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고 한적하니 더욱 드라이브하기에 최적의 상황이었다.
교수님 몇 분을 소개 받아 그분들의 강의를 들었으며 (매주 4회 청강했다) 학생회관과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100여년 역사의 고풍스런 건물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세월에 녹아 들어가는 듯 황홀했다.) Dixon Hall(학생 체육관으로 지역 유지 기증자에 의해 건설된 최첨단 건물들이 많다.) 에서 젊은이들과 같이 운동하면 강한 기운을 받아서 나 역시 젊어지는 것 같았다. 모델같이 멋진 친구들도 많지만 생각보다 특이 체형의 - 너무 짧거나, 너무 튀어나오거나, 너무 크거나 - 젊은이들이 많아 신기했다. 한국 사람들의 체형은 그에 비하면 지극히 정상이고 한국에 더 미인이 많은 것 같다. 한국을 떠나기 전 하루 종일 환자와 씨름하면서 몸도 피곤하고 늦은 오후에는 저혈당으로 어지럽기도 하고 두통까지 자주 느꼈는데 미국의 생활을 하면서 낮잠도 없이 활기차게 생활 할 수 있었다. 체중도 2달 만에 9kg이나 빠지면서 회춘하는 듯 했다.(믿거나 말거나.) 운동도 운동이지만 귀찮아서 간편한 요리를 찾다보니 하루 2끼를 스테이크와 (큰 세 덩어리가 20달러이내) 셀러드만 먹게 되어 저절로 <황제다이어트>가 되었다. (일반 식료품들이 충분히 저렴하여 배고플 민중이 없다. 물론 유기농만 판매하는 비싼 곳도 있긴 하지만 안가면 그만이다. 요즘 우리나라처럼 괜히 타인과 비교해서 갈등을 유발 할 이유가 없다.) 수목원처럼 울창한 캠퍼스를 다니는 젊은이들의 정열은 사방에서 넘치고 교수와 학생간의 격의 없는 대화를 옆에서 보면서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끼곤 했다. 그들에게 불필요한 격식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누구나 외적인 복장은 평범했고 오직 내적인 삶에 충실 하는 것 같았다. 맨발로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인디언의 풍습에 호의적인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 수영장에 –이곳은 거의 100년 전부터 남녀 수영장이 각각있었다 – 학교 구성원들이 나체로 수영을 했다 한다. )
하지만 6월 중순이 지나면서 여름방학이 되어 내게도 방향 전환이 필요했다. 미국에서 영어회화를 배워야 하는데 청강과 간혹 이어지는 교수님과의 대화로는 해결이 될 수 없었고 아무리 CNN을 많이 봐도 소용없는 듯 했다. 준비한 특허에 대한 상의도 만나는 교수님마다 설명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렇게 2달이 금방 지나고 있으니 마음은 급해졌다. 그러다 어느 교수님의 좋은 반응이 나왔고 준비한 특허 5개중 3개를 대학생들과 연구하게 ( Capstone ; 학부 졸업 준비생들의 연구팀 )되었다. 바로 7월 13일 그 날이 내 생일이었으니 최고의 생일선물이었다. 부족한 영어는 여전히 바보처럼 헤맸지만 그것 만 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또한 Oregon 서부 지역은 민주당 성향이 강하고 타문화에 대한 배려심이 깊은 분들이 많은 곳이라 민간단체인 다문화 교육시설이 활성화 되어있었다. 그곳에서 자원 봉사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 센터를 (CMLC ; Corvallis Multiliterary Center) 통해 세분의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보통은 한 사람이 한분을 만나는데 나는 그곳을 청소하고 도와주며 – 약간의 기부금도 내고 - 부탁해서 세분의 선생님들과 매주 일대일로 만났다. 대부분 학교 선생님, 직업 물리치료사 등으로 정년퇴임하신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재능기부하고 나는 열심히 배우면서 간혹 한국 식사대접을 했다. 사실 그게 영어로 말하기가 피곤할 때는 시간 때우기 더 편했다.) 학교는 방학으로 휴강이지만 나의 일주일은 여전히 바빴다. 매일 바쁜 하루일과 후 침대에 들어가면 1분도 안되어 깊이 골아 떨어졌다. 그래도 마음의 여유 속에서 나온 새로운 아이디어가 하나 더 생각나서 교수님에게 이야기하니 오히려 그것이 추천되어 기존의 것 중 하나를 교체해 연구 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내가 예상했던 이상의 삶이었다. ( 당연히 친구의 통역 도움도 컸다.)
( 세계 제1차 대전 참전하기 위한 100여년 전 학생들과 현재 flying fish 연습중인 학생들 )
뜨거운 태양과 화려한 하늘, 짙은 숲 향기와 주민들의 넘치는 활기는 내게 황홀하고 과분한 향연을 연속이었다. 수많은 개들 중에서 짖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고 사람들은 어디서나 다정하게 인사를 나눈다. 차량에는 자전거와 카약이 달려있고 주위에 널려있는 숲과 호수에서 편하게 자연을 즐기며 넓은 잔디운동장에서 자녀들의 야구 시합을 응원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많이 부러웠다. (내 아이들이 이렇게 살아봐야 하는데.,..) 틈나는 대로 Coupe애마를 타고 드라이브 하면서 Oregon의 대자연을 만끽했고 가까운 친구들을 찾아 장거리 여행도 했다. 특히 Oregon Coast Highway 101의 절경은 소문대로 세계 최고였다. 물론 골프도 열심히 했다.(그게 가장 남는 장사일 듯 했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골프장이 있어서 아침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9hole을 돌았다. 연수 온 교수들과도 같이 했지만 주로 젊은 친구들이라 중급인 내가 오히려 가르치는 우스운 처지가 되니 자주 같이는 못했다. 연수를 마칠 때 쯤 되니 공 2개를 가지고 분실하지 않고 서로 가깝게 치면서 9hole을 혼자 편하게 돌 수 있을 정도 되었다. (그래도 아직 퍼팅은 요원하다.ㅠㅠ) club house를 열기도 전에 일찍 시작하기 때문에 다 마치고 돌아가면서 쿠폰으로 후불 계산했으니 직원이 나를 신기하게 봤다. 구장 관리도 잘되어있고 사람이 없어 한가한데 쿠폰 값은 회당 18불이다. 마음껏 잔디를 팠으니 모든 것이 천국이다.
(98년 만의 완전 개기일식을 내 집 뒷동산에서 볼 수 있었다. 15분간의 변화 )
이렇게 시간은 흘러 벌써 6개월이 다 되었다. 많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있어야할 곳이 한국이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국 준비를 했다. 영어를 혼자 와서 공부했으니 가족단위로 온 경우의 2년 치에 해당되게 all in 했는데도 영 발전이 없는 것을 보면 난 영어에 있어서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 학력고사 영어도 반타작 했었으니 말이다. ㅠㅠ)
그 동안 약8,000mile을 문제하나 없이 잘 달린 내 애마가 마음 같지 않게 팔리지 않아 쓰린 마음으로 헐값에 딜러에게 넘기고 (2door가 폼은 나지만 매도할 때를 생각한다면 4 door를 추천한다.) 모든 가구, 가전제품들은 다니던 교회에 기증했다. 떠나기 전날 밤 내 집은 처음 올 때처럼 고요 속에서 텅 비워 졌다. 이곳에 올 때 골프채와 꽉 찬 큰 가방 하나였는데 돌아갈 때는 오히려 가방이 가벼워졌다. 사실 우리가 악착같이 아끼고 차지하고 숨겨서 보관 하는 것들도 막상 마음만 비우면 전부 버릴 수 있는 것들이다. 어차피 빈손으로 떠나는 삶이지 않나? 하지만 내 추억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고 기억에서도 절대 지워 질 수 없으니
금전적으로 손해는 컸지만 보람된 경험이었다고 자부한다. 무엇보다 과거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 할 수 있게 되었고 남은 삶을 위해 지금부터 어떻게 준비해야하는지 정리할 수 있는 귀한 시간들이었다. 이곳에서 연구하려는 3개의 특허 건은 처음에 비해 반응이 식었으니 서양인들 특유의 예의상 하는 오버 액션에 살짝 속은 것 같지만 일단 관심을 받고 일을 시작 했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내년의 결과를 기다려 본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색 자체보다는 변화가 주는 매력이라 생각한다. 탈도 많았던 젊은 시절의 수많은 실수와 고난 속에서 만들어진 현재의 나를 생각하면 별것 없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미약하나마 항상 변화를 추구하면서 살고 있다는 자긍심 때문이다. 호기심이 꺼지지 않게 가능한 눈을 뜨고 살아가려한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인생은 나만의 한번 뿐인 것이니 말이다.
이런 나의 일탈을 기분 좋게 허락해 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하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늘에 감사한다. 이제 다시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야겠다.
Carpe Diem
(뒷동산의 석양과 뒷마당. 이곳은 성별 구분이 복잡하다.)
<6개월 체류하고 깨달은 진리>
1. 미국인들은 참 친절하다. ( 다 그런 것은 아니다.)
2. 법을 정말 잘 지킨다. ( 벌금이 엄청 무섭다. 법은 이렇게 일관성이 있어야할 듯.)
3. 대자연의 혜택이 엄청나다. (인디언들이 불쌍하지만 미국이니 이정도 유지했을 것이다.)
4.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에 사소한 것을 과장된 표현 한다.(내 발명이 정말 대단한 감동을 준 줄 착각했다.)
5. 말로 한 것은 꼭 지킨다. 예의상 하는 빈 말은 없다. (자기 남편이 내 제품 나오길 기다린다니 교수님께서 내 연구가 계속 하시길 바란다.)
6. 상대의 외형상 변화에 절대 언급이 없다. ( 산적처럼 수염을 길러도 내게 아무 말 안한다.)
7. 옷이나 신발등 사소한 것을 칭찬한다. (자기 집 주소를 답 하는데도 ‘perfact!’ 한다.)
8. 시골이라도 일반기반 시설은 도시와 거의 같다. 위치만 시골일 뿐이다 (우리는 화장실도, 사무 처리 인프라도 다 시골스럽다. 그게 또 매력이긴 하지만.)
9. 시골 일 수 록 인간적이고 정이 많다. (사람은 다 환경에 적응한다.)
10. 누구에게나 하루가 24시간이고 웃는 얼굴이 아름답다. (행복을 위한 제일 중요한 요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