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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야기

儒敎유교의 중요성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이성계가 고려를 망하게하고 조선을 세우면서 세가지를 변화 시켰다.

첫째가 국호를 고조선을 이어가는 나라라는 뜻으로 ‘조선’이라 했고 ( 고구려를 잇는다는 고려보다 더 윗선으로)
둘째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했으며

셋째가 정치기본으로 삼은 종교를 불교에서 유교로 바꿨다는 것이다.

소위 숭유억불 정책인데 아마 이것이 가장 약한 듯 하면서도 강한 정치적 결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국호와 수도명이 바뀐지 700여년인데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 유교적인 영향력은 막강하니 말이다.
유교의 발전을 위한 선비를 양성하는데 전국에 230여개의 향교를 만들고 한양에는 성균관을 두어

모든 현판을 동일하게 명륜당 明倫堂(인간의 윤리를 밝게하는 곳)이라 하였다.
오늘날에도 향교가 있던 동네를 명륜동이라 하고 있는데 과거 나의 모교( 고려대 의과대학)가 있던 곳 역시 명륜동이었다.

儒敎유교의 근본은 인의예지仁義禮智다.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 나 자신을 바로 잡으며

공경지심恭敬之心으로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사회와 국가를 발전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런 유교 윤리속에서 빛나는 선비가 두분 있었으니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인데 두분 성격이 조금은 다르다.

이황은 천성적으로 너무 소심하고 측은지심이 강해 정치중심의 약육강식 세상에서 벗어나 단양군수, 풍기 군수등 변방관직을 선호했다.

왕의 부름으로 간혹 중앙에 서있긴 했지만 대부분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했고 아호마저 퇴계(退溪, 계곡으로 물러난다는 뜻으로 지역명

토계를 개칭함)라 하다가 주역을 통달한 선비답게 자신의 죽는 순간까지도 예상하고 제자들에게 부축해달라하면서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모든관직명을 제외하고 아주 간소하게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한다. 향년 70세다.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스러우며 적극적인 성격이었다한다.

13세에 과거급제를 시작으로 승승장구하여 최고위직 6개중 4개를 두루 역임했으며 낙향후 율곡촌(栗谷村)으로 거처를 옮겨 후진양성하다

향년 49세로 돌아가셨으니 관직에서 스트레스 받아서 이황보다 더 일찍 돌아가셨을까 싶다.^^
효심이 지극하여 장남이 아님에도 3년의 모친상을 치루고 삶이 허망하여 속세를 떠나 금강산에 입산 수도하며 불교에 귀의하다가

2년만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자신의 거처하던 곳을 금강산과 비슷하다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 명함)

숭유억불 정책의 와중에 기득권 세력인 유림의 많은 지탄을 받자 9회의 과거응시에 9회의 장원을 하면서 유학자들의 반발을 누그려 뜨렸다

하니 과거나 지금이나 똑똑한 사람은 뭔가 다르다.

사실 이분은 못지 않게 어머니 신사임당이 유명하다.
아버지 신명화(申命和)와 어머니 용인 이씨의 딸로 사임당이라는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신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조광조와 인연으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두 부부 사이에는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아들을 입양하거나 축첩하여 기어히 아들을 선호하던 당시와는 다르게 오직 딸의 교육에만 신경쓰는 개화된 부부였다.
특히 둘째인 신인선(신사임당)을 총애하여 사임당은 19세에 덕수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고도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외할아버지도 그렇게 대릴 사위를 했다니 참 개화된 집안이었으며 이런 환경에서 교육을 받은 자녀들 역시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분들에게 수많은 제자가 있어 유학이 더욱 발전되고 임진왜란후 이분들의 책이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일본에서도 유학을 발전 시켰으니

그 학문적인 업적은 대단하다 생각한다.
한 왕조가 500년을 이어가기가 어려운데 조선건국 200년후 발생한 임진왜란 이후에도 300여년을 더 이어갈수 있었던 것은 이분들의 제자들이 이끌어가는 유교 사상이 큰 버팀목이 되어준 이유가 되리라 생각한다.

항상 그랬듯이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는 변화시기면 조선에서도 당연히 반역 혁명이 새나라를 건국햇어야 되는데 말이다.

물론 한심한 당파싸움의 역사도 있지만 그 못지 않은 정신적 가치도 있었다고본다.

내가 이런 유교 사상을 운운하면서 정치의 근본이어야 한다는 것 보면 나이가 들은 것 같지만 요즘 돌아가는 세태가 너무나 걱정 되는 것은 사실이다.
동생이야기를 들으니 최근 미국에서 <hunger game>이라는 영화가 개봉 되는데 10대 아이들을 뽑아서 서로 죽이는 영화라 한다.

인기있는 유명한 책을 영화화 한것이라 하는데 미국은 정말 이해가 안가는 기독교 선진국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 순간에도 학교의 폭력과 사제지간의 괴리 그리고 가정의 파괴등 많은 문제들이 풍요로운 삶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다.
내가 하면 로멘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요즘같은 세상에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세파에 지쳐 속편히 잊어버리려 하는지 모르겠다. 

참고 ; 성균관대 오원석 교수님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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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