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제일은행은 나의 모든 것과 같다. 아니 우리 가족 모든 것의 반석이었다.
보성 촌에서 삶이 시작되는 우리 집안을 서울에서 터전을 잡게 해준 큰 힘이었다.
아버지께서 그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은행에 입사하시고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보성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공부하고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한 아버지 덕분에 난 태어나자마자 서울에서 제일은행의 보호아래
삶을 시작했다. 아버지 형제 6남매중 다섯분이 보성에서 차례로 서울로 올라오셔서 큰형님 큰 형수님이 부모님역할을 하셨다.
나도 여수에서 태어난지 1달째 합류했다. 그 당시 장남은 그렇게들 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 수도서울 정착에는
부모님의 노력이 중요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전라남도 보성 촌의 함양 박씨 우리 집안을 분명히 이끌고 키워 주셨음엔 집안에서 존경을 받으셔야한다고 본다.
불광동 유치원때는 아버지의 은행 해외 지점건으로 일본 오사까로 가서 3년 반을 살았다.
그 당시에는 내가 일본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환경인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귀국후 일본에서는 지겹게 먹던 싸구려 바나나가 한국에서는 너무 비싸서 먹지 못는 상황에 되어서야
내 생활의 변화를 뼈져리게 느꼈다.
그래도 생전 처음 맛본 짜장면과 축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 즐거운 나날의 소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도 일본말 밖에 모르는 우리 삼형제 공부 위해 정말 절약하시면서도 열심히도 공부 시키셨다.
우리 삼형제는 ‘일일공부’ 학습지 숙제 하면서 참 그때 많이도 맞았다.
아버지 근무지인 명동에 찾아가 (일제시대 석조 건물의 높은 천정에 놀랐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외식도 간혹 해보고
10원짜리 지폐에 그려있는 한국은행을 보면서 신기해 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어린 마음에도 내게는 가는곳 마다 은행간판이 저절로 눈에 들어왔다. 모든 지형의 기준은 은행 간판이었다.
의사로 생활하는 요즘은 병원 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은행 옆 편의점이 아니라 병원 아래층 편의점이다.
대학교때 아버지께서 지점장이 되시고 처음으로 기사운전하는 자가용을 배정 받으셨다. 지금과 비교하면 정말 호랑이 답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숙부님 모두가 월급장이인 우리 집안의 경사였다.
덕분에 학교 등교 할 때 간혹 얻어타고 버스비 아껴서 점심 메뉴를 상향 시키기도 했다.
대학 학비도 은행에서 자녀 2명까지는 지급해줘서 우리 삼형제는 군대를 번갈아 가면서 대학 학비를 모두 지원 받았다.
정말 이런 알뜰함이 우리 가족의 생활 철학이다. 병원 개업할때도 ‘제일‘이라는 상호를 쓰려고 막판까지 고심했다.
이렇듯 우리 집안과 우리 가족을 먹여주고 키워준 곳이 제일 은행이다.
그런 제일 은행이 역사의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IMF를 통해 그나마 이름이라도 남아있었는데 이젠 조흥, 상업, 한일, 동남, 서울, 주택은행등 여러 은행처럼 완전히 사라졌다.
(은행을 마음껏 이용해 먹고 버리는 비열한 정치인들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참는다)
내가 1977년 중학교 입학해서 교복을 처음 사 입었던 종로의 화신 백화점을 기억하는 젊은이들이 요즘은 없듯이
제일 은행도 같은 과정을 겪을 것이다.
세월의 물은 잔잔히 흐르고 기억의 물보라는 안개처럼 사라져간다.
물론 새로운 현상들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면서 역사는 조용히 반복 될 것이다.
나 역시 발목 잡고 과거에 머물러 있고 싶진 않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고향을 그리워 하듯 난 언제까지 사라진 제일은행을 기억 할 것이다.
내게는 불행히도 특별히 기억되는 고향이 없다. 그저 살아온 서울의 한 구석들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은 있으며 그것은 나의 분신이기도 하다.
잘 가라 제일은행아.
2012.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