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갑자기 몇일전 내게 명동한번 가보자 하셨다. 평소에 그런 말씀 안하셔서 의외 였는데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4학년때 출근 하시는 아빠에게 저녁에 베드민턴 하자고 약속하고 하루종일 기다렸는데 지친 모습으로 늦게 퇴근 하셨다.
삐진 나를위해 밤늦게 같이 베드민턴을 쳐주셨는데 어린 마음에도 죄송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내가 요즘 그런 추억을 남기자는 생각에 막내와 자주 놀아준다. 항상 나보다 바쁘게 사시는 아버지께서 같이 산책 가자하시니 반가웠다.
망설이시는 어머니는 모시고 전철 이용해서 명동역에 내리니 별천지다. 정신없이 사람들 틈바구니사이로 군중속에 묻혀 네온사인의 현란함과 코끝의 시린 상쾌함을 느끼면서 분위기를 즐겼다.
아버지는 당당하지만 천천히 걸으셨고 어머니는 내가 부축 해 드려도 무게를 느끼지 못할 정도이시니 세월의 흐름에 애잔함이 느껴졌다.
수십년만에 명동을 걸으시는 어머니는 반가움에 기억을 더듬어 걸으셨고 아버지의 랜드마크는 다 역시 은행이다.
저기는 상업은행 자리였고 저기는 조흥은행 자리였고 하시면서 이미 사라진 은행 이름들을 기준으로 방향감각을 타셨다.
이제 곧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던 제일은행도 명패를 내리게 되니 말씀은 안하셔도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처럼 무척 서운하실 것 같다.
과거 1970년초 명동의 제일은행 지점에 근무하셨을 때 어쩌다 있는 외식이면 어머니는 삼형제 쫙 멋지게 양복으로 차려 입히고 명동 나와
사보이 호텔 철판 구이집에서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아버지와 어머지는 여러 골목을 지나 ‘가무’ 라는 까페로 들어서시면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명칭인 이곳을 신기해 하셨는데 실내에 들어가셔서는 더욱 놀라와 하셨다.
과거의 모습을 최대한 살린 고풍스런 상태였으며 중국 대사관의 정원이 보이던 창가의 자리도 그대로라 하셨다. 지금은 다른 건물로 막혀서 보이지 않지만 창틀의 모양은 그대로라 하시면서 추억을 찾아 되돌아온 영화 <미로의 선택>의 한 장면 같다고 좋아하셨다.
앤티크 소품들 속에서 차 한잔 하시는데 어머니를 더욱 즐겁게 해드린 것은 바로 착한 가격. 찻값 5500원에 맛난 케잌 조각까지 덤으로 주니 명동에서 이런 장사해서 이윤을남기나 싶었다.
종업원들은 서로 농담하느라 정신 없고 손님들은 수다 떠느라 찻잔에 입이 닿질 않는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이미 선점한 창가가 비워지길 기다리며 멋진 추억 사진 한 장 찍어보려하는데 그들의 수다는 그칠 줄 모른다.
뭐 할말이 저렇게많고 재미있을까? 샹들리에, 전등, 수저걸이, 화장대등 과거의것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어 영화<오페라의 유령>의 첫 장면이 어려풋이 겹쳐진다. 반들반들한 돌바닦과 천정의 나무들을 쇠대들보로 보완한 모습은 추억을 살리려는 주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이곳 주인은 아마 경영에는 관심이 없이 추억으로 충분히 사시는 부동산 재벌일 것 같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추가로 시킨 진토닉을 마시면서 과거 여행을 다니며 시간 가는줄 모르게 보내다가 옆건물의 가게 간판불이 꺼지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귀갓길 주변 가계와 노점상들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외국인들의 담소들이 또 하루가 저물어가는 명동의 밤하늘에 수많은 이들의 추억이 되어 수북히 쌓여간다.
나중에 내가 이곳에 다시 오면 오늘이 너무나 그리워질 것 같다.
추억은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이제 정말 한해가 저 멀리 가버리는 구나. 다시 못볼 한해가...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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