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7월13일 (음력6월 5일) 태어나서 유치원 다닐 때까지 별 기억이 없다. 정말 하나도 없다.
약 20여년전 내가 태어났던 전라도 여수의 집을 부모님과 함께 찾아봤다. 건물은 고쳐도 구조는 비슷하다 하셨다. 어머니는 갓 태어난 나를 업고 저 아래 요정에서 술 드시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기다리셨다 하니 참 남자에게는 좋은 시절이었다. 그리고 대조동으로 상경.
1970년 아버지의 제일은행 일로 일본으로 건너가 신천지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와의 생활 수준이 천지 차이 였으니 말이다.
(1973년일본에서 귀국때 어머니께서 가스오븐을 사 오셨는데 우리나라 뉴욕제과 회사에서 사겠다고 전화 왔었단다.
일본은 집집마다 다 있던 것이데... 그런 우리나라가 일본과 지금 이정도면 정말 세상 완전히 뒤집어진 꼴이다 )
온갖 먹을거리가 넘치는 슈퍼의 화려함이나 값싼 바나나에 흠뻑 매료 되었다. TV 는 컬러화면이고 채널도 수없이 많아 정신 없었고 집집마다 자동차 (그것도 자동 창문)가 있었다.. 아침마다 어린이 프로를 보고 학교에 갔는데 특히 울트라 맨을 보면서 정말 많이 뛰어다녔다.
아파트를 나와 왼쪽을 계속 쭉가면 아세아가와 역앞 상가들 골목을 지나 개울 건너 유치원을 지나서 조금만 올라가면 야마데 소학교였다. (1997년에 가봤는데 집들이 현대식화 되고 넓게 보이던 길 폭이 좁다는 것 말고는 유치원 복장 까지도 정말 거의 변화가 없었다.)
1971년 아버지께서 검정 전화기로 한국과 국제 전화후 한숨 쉬신 기억이 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아버지께서(귀한 장손) 땅을 파면서 장난하던 자국이 비에 젖어 망가질 까봐 노심초사 하면서 지켜주시던 그런 할머니 였다 하셨다.
피아노 배우면서 경합 전날에 문방구 가서 악보를 복사기로 복사하는 데 너무나 신기했다.
참 그때 도벽이 생겨서 몇 번 가게에 들어가 물건 훔치기도 했다가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곤 했는데 한번도 안 걸린것 보면 아마 어른들이
다 알면서 참아준 것 같다.
1972년 소학교 2학년때 학교에서 차 타이어 갖고 놀다가 배수관 파이프를 깨뜨렸는데 숨기려다 결국 걸려서 엄청 혼났다.
무엇보다 이쁜 담임 선생님이 마음아파 우시는 모습이 더욱 나를 슬프게했었다. 그 뒤로는 절대 심한 장난 안하는 착한 학생이 되었다.
1973년 다시 한국으로 귀국. 입국 공항부터 작았고 이사간 여의도는 지금과 다르게 시범 아파트 단지 하나만 있었고 그곳에서 정 반대편 국회의사당 까지 뻥 뚤려 있어서 항상 모래바람이 일었다. 놀이터에서는 놀다가 일본말하는 우리 형제들을 보고 어른들이 무엇이가 느낌이 안좋게 말을 해 울면서 집에 가기도 했다. 한마디로 모든것이 황량했다.
무엇보다 학교 등교 첫날부터 학생을 때리는 여자 선생님 때문에 너무나 놀라서 집에 오자마나 어머니께 큰눈뜨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인데 나도 곧 선생님의 매질에 적응이 되어 놀라지도 않게 된다. 일본에서 가져온 향기나는 색종이로 여자들에게 인기 좋았는데 색종이가 다 없어지면서 인기도 급락한다. 일본에서 공수한 장난감은 매일 찾아오는 친구들 때문에 한달만에 다 망가져 버렸다. 전혀 몰랐던 한글을 배움과 동시에 일본어를 잊어버린다. 내 머리의 한계인가보다.
6학년때 일본에서 오신 선생님 통역을 부탁 받았는데 못했다. 그래도 귀국후 초등학교 3학년 첫 시험이 수학은 98점인데 다른것은 다 5점 전후였던것 보면 머리가 없진않다고 믿는다. 그래도 전혀 몰랐던 축구 라는 운동 경기에 빠져 신나게 놀았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없었다.
1974년 8.15 경축사를 보다가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TV화면이 꺼졌다.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는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하철 개통 되었다고 신문 방송이 난리 났는데 일본에서는 당연히 봐 왔던 것이라 이상했던 기분도 생생하다.
그로부터 몇일 후 동네 수영장에서 물안경 쓰고 놀다가 친구 형의 무릎에 물안경이 깨져서 얼굴을 50바늘 꿰매었다. 그때 내가 눈을 다쳤으면 인생 참 기구했을것이다. 그 이후로 신문에도 기사화 되면서 물안경이 유리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뀌었으니 내가 살신 성인한 꼴이 된건가?
아무튼 눈 앞에서 유리가 깨졌는데 눈을 다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보살핌이라 믿는다.
참 그때 처음으로 학교에서 상을 받았다. 공부가 아닌 치아가 건강하다 해서 <영등포 대표 건치 아동상>.
1976년 6학년이 되면서 공부에 취미를 붙이고 반에서 1등을 하기 시작한다. 공부 잘하는 우등생에 속하면서 여자동무들이나 친구 엄마들이 나를 대하는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즐긴다.
1977년 중학교 입학. 초등학교 담장 옆의 학교로 옮겼는데 교복입고 머리깎은 내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총각 냄새나는 형들이 무서웠다.
바리깡으로 머리 깎던날 친구들하고 서로 얼굴 보면서 웃었었지.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다른것이 많았는데 특히 선생님의 매질은 대단했다.
특히 유*우샘. 한참 배우는 테니스 폼으로 뺨을 때리는 모습은 거의 미친 사람 수준이다. 남학생 여학생 구분없이 그랬으니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그땐 비일비재 했다.
1978년에는 핸드볼로 우리6반이 우승했다. 전체 가을 운동회에서 응원단에 속하면서 적극적인 성격으로 살아갔던것 같다. (그때 지도해주시던 갓 대학 나오신 초임인 임성근 선생님께서 지금은 여의도 윤중 중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계시면서 곧 정년 퇴임 하신다. 세월 빠르다 ) 차전놀이 대표로 올라타기도 했다. 참 내가 첫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가 그 즘인것 같다.
간부 수련회 다녀와서 버스를 같이 타면서 왠지모를 이상한 감정에 빠져드는 나를 느꼈다. 6월 18일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상하게 이런것은 안잊혀진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고 서양에 대한 동경과 이성에 대한 관심으로 줄리 엔드류스에게 팬레터를 보냈고
독일인 팬팔 친구(Doris)도 사귄 시절이었다. 고교 얄개 씨리즈를 보면서 참 많이도 웃었다. 그때의 주제 (Yellow Ribon...)음악은 지금도 생생하다.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국제극장을 자주 갔었고 성룡의 취권과 스타워즈는 종로 3가 단성사에서 본것 같다.
그때는 내 인생의 황금기로 공부는 항상 전교 5등이내 매일 태권도 하면서 운동도 최고 수준으로 지금 생각하면 엄친아였던 것 같다. 체육시간 오래달리기 시험도 제일 늦게 뛰고 제일 일찍 들어와 아무탈 없이 친구들 기록을 반장으로서 체크 했으니 말이다. 공부하다 규칙적으로 밤마다 10시가 되면 윤중제를 뛰고 ( 그때 작은 벚나무들이 지금은 거목이 되어 여의도 벚꽃놀이를 이루고있다 ) 교회에서는 성가대로 토,일요일 열심히 지내면서 하루하루 계획성있게 줄 그어가며 완벽하게 일기로 마무리하는 참 착실한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땐 귀신 씌워진 로보트 같았다.
간혹 나사가 빠지기도 했다. 학생회 간부로서 학교 앞을 오가는 버스의 버스 안내양들과 간담회를 갖었는데 나중에 기념품을 전달할 때 앉아있던 순서대로 하질 않고 제일 이쁜 누나에게 줘서 같이 합석했던 동료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 특히 여학생들에게는 완전 찍혔다.
그때부터 이쁜 여자를 대 놓고 밝혔던것 같다. ^_^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 당했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것이다. 가깝던 학교 선생님 한분이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첫사랑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받았다. 죽음에 대한 나의 감정을 실은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나는 그때 죽음을 처음 생각했던것 같다. 사춘기의 예민한 시절에 한동안 충격이었다.
그 편지를 왜 찢어버렸는지 지금도 후회가 된다. 일종의 추억거리인데...
이리역 폭발 사고났었지. 하춘화씨가 큰일 날뻔 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보면 그때부터 벌써 유명했던것 같다.
1980년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밴드부를 피하느라 고생했다. 뭘 보고 나를 가입 시키려 했는지... 과외 하면서 대학 입시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데 7월 31일 과외 금지조치가 이루어지면서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너무 나사가 풀려버렸다. 자유를 만끽했다.
대가리가 컸다고 신을 거부하고 교회를 멀리하였고 공부보다는 다른쪽에 관심을 갖으면서 성적에 문제가 생겼다. 속에서 솟아나난 열기를
주체 못해 비오는 날이면 자전거 타고 수시간을 헤매어 달리기도 했다. 믿었던 첫사랑은 선린상고 박노준을 병문안 가서 신문 기사에 까지 나와 내게 큰 실망을 줬다. ( 사실 별것 아닌데 그땐 그게 너무나 싫었다 ) 다들 그렇게 보내던 시절이라 생각한다.
고등학교 시절은 별 특이 사항도 없이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1981년 고2때 내가 제일 기피하던 선생님의 담임반에 반장이 되면서 최악의 시절이었다. 반항 한다고 공부도 안했는데 참 유치한 시기였다. 결국 손해는 나인데 담임샘에게 반항한다고 반장이 공부를 안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반항 할것을 해야지... 참 국풍 81을 여의도 광장에서 열어서 재미있는 추억도 있었다.
1982년 고3때 두발 자유화 되면서 머리를 길렀고 내가 마지막 검정 교복 세대였다는 것 말고는 그냥 평범한 대학 입학 준비 그런 기간이었다. 항상 새벽 2시마다 야식을 준비해주신 같이 공부하던 친구 호영이 어머니의 정성은 지금도 감사하다. 지금 생각하면 내 능력의 80% 정도 밖에 소비하지 않고 공부했던것 같다. 그것이 조금은 아쉽다. ( 하긴 그 다음의 삶도 뭐 능력의 100%를 다 소비하지 않는것은 성격인듯 하다 )
그리고 나서 성인이 된다.
성인되고 벌써 30년이 되었다. 참 빠르다.
앞으로 길어야 20년이고 놀아봤자 10년이다. 내 인생이 이정도로 마무리 된다 생각하니 좀 허망하긴 하지만 운명이려니 한다.
나보다 일찍 떠난 수많은 멋진 인재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할 것은 다 해보지 않았던가?
그럼 된거다.
군대가서 기어보고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해외 여행도 가보고 의사 자격증도 따보고 효도도 하고 존경도 받아보고 비난도 받아보고
경찰서도 가보고 재판도 받아보고 아파도 보고 웃어도 보고 술맛도 알고 다이어트도 해보고 친구 문상도 하고...
그럼 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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