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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글을 쓰는 이유 (2)



포크너에게는 글 쓰는 일이 설명되지도 않고 논의할 것도 없는 당위처럼 제시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작가가 악마의 부추김에 이끌려 글을 쓴다는 점이다. 그는 글을 쓸 수밖에 없는데,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때로는 글을 쓰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포크너는 인터뷰를 싫어했는데, 한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뭐, 항상 술을 마실 수는 없잖아요. 항상 먹을 수도 없고, 항상 정사를 나눌 수도 없고 말입니다. 달리 할 게 뭐 있겠어요?”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난 글을 써야만 합니다. 더 이상은 글을 쓰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고 글을 씁니다.”

루이 기유의 대답은, “우리는 모두 우리의 감방 벽에다 글을 쓴다.”
달리 말해, 모든 인간은 자기 고독 속에 갇혀 있다. 글 쓰는 것이 거기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이다. 물론, 혼자 있고 싶어서, 백지를 마주하고 자기 자신과의 시간을 향유하기 위해 글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우리가 글을 쓰는 건 너무 혼자여서다.

모방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무언가를 증언하려는 사람들. 소통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 진실을, 자신의 진실을 부르짖을 욕구를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거짓을 지어낼 욕구를 느끼는 사람들. 신들린 상태의 무당처럼 글을 쓰는 사람들.


2006년 스톡홀름 연설에서 노벨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은 이 문제를 돌아본다.
내가 글을 쓰는 건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노동을 할 수 없기에 글을 씁니다. 내 책 같은 책들이 쓰이고, 내가 그것들을 읽을 수 있기 위해 글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온 세상 사람들에게 무척 화가 나서 글을 씁니다. 내가 글을 쓰는 건 온종일 방 안에 갇혀 있는 게 좋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바꾸지 않고는 현실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글을 씁니다. 나는 우리가 어떤 유형의 삶을 살아왔는지, 나와 다른 사람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는 모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온 세상이 알게 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나는 종이와 잉크 냄새가 좋아서 글을 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을, 소설 예술을 믿기에 글을 씁니다. 습관이자 열정이기에 글을 쓰고, 잊히는 것이 겁이 나서 글을 씁니다. 명성과 명성이 가져다주는 관심이 좋아서 글을 씁니다. 그리고 혼자 있기 위해 글을 씁니다...

반대로, 글을 쓰려는 욕구에 격분해서 반대한 사람이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1962년, 그는 막 『서리』를 출간했다. 호평과 악평이 눈사태처럼 쏟아지자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모든 희망을 문학에 실은 나의 잘못이 나를 숨 막히게 하리라고 확신했었다. 나는 문학에 대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문학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숨 막히는 진흙탕 속에 내던져졌고, 거기서 더 이상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는 빈에서 맥주를 배달하는 운전수로 취직한다. 이 분노가 대체 불가능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유머를 열 배로 불린다.


장 폴랑은 “어떤 작가는 자신을 사제로 생각하고, 또 어떤 작가는 정치가로, 또 어떤 작가는 장군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따금 한 편의 작품이 세상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프리모 레비는 그 예로 히틀러를 꼽는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쓰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말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책에서 구상한 그대로 세상을 다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결국 세상을 파괴했을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가진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길 정도로 활동했던 큰 정치인들은 문인이 되려다 실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보케르의 야식』의 저자와 『적의 불화』의 저자가 그렇다.
다니엘 페나크의 표현에 따르면, 어떤 이들은 글을 쓰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쓴 사람이 되기 위해 쓴다. 이 말은 작가라는 지위를 얻기 위해 대필작가를 두는 사람들의 기이한 행동을 설명해준다. 그래서 정치에서, 학문에서, 사업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또 다른 인정을 받기 위해, 소설 저자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것이다. 문학이 아무리 평가절하되었다 해도 그들의 눈에는 지고의 가치를 갖는 모양이다.
체홉의 『갈매기』에서 한 인물은 이렇게 털어놓는다.
따지고 보면, 시시한 작가라 하더라도 결코 불쾌한 일은 아니다.


나도 글 쓰는 사림이 좋아서 글을 쓰는 건가? 그래도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니 좋은 취미라고 믿고 살아간다. 늙어서 글 쓰면 시간이 얼마나 잘 가겠는가?  체력에 따라 골프에서 등산으로 그리고 당구로 넘어가서 나중에는 집안에서 틀어 밖혀서 생활 한다는데 글이라도 쓰면 얼마나 좋은가? 꿈에서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치매도 방지 되고. 지금부터 연습하는거다. 별것 아니다. ^_^         ( 참고 nav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