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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두 번의 26년 (1)

두 번의 26년

2015년 한 해가 장엄하고도 우아하게 지나간다. 존경하는 아버지가 소천하시고도 벌써 1년 반 이상 지났다. 죽음은 ‘죽을 뜬 자욱 같다’는 말처럼 떠나는 이는 자취 없이 사라지고 남은 세상은 변함없이 잘 굴러간다. 인생에서 누구나 한번은 경험하는 일이겠지만 이번 일로 나는 다소 냉소적으로 변한 듯하다. 아니 오히려 불필요한 것을 버릴 현명함을 갖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그동안 결국 사라질 사소한 것들에 의미 없는 무게를 두고 살아온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사소하게 치부했던 주위의 작은 조각들이 한 겨울의 손난로처럼 소중해진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 봄꽃이 이렇게 예쁜지 오늘 처음 알았다’고 하신 것처럼 세상에서 정말 귀한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배웠다. 이렇게

인간은 연륜과 함께 지혜를 쌓아가는 것이고 의료 전문가인 의사로서도 그렇게 담금질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 두 번의 26년이 흘렀다. 초짜 의사되기 위한 26년 그리고 성숙된 의사되기 위한 또 한 번의 26년.



의대 졸업 후 5년의 수련기간을 거쳐 정형외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서 환자의 모든 책임을 홀로 지는 의료인 생활을 시작 한 지 벌써 20여년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짧지도 길지도 않은 파란만장한 무념무상의 시간들이었다. 그 동안 수많이 환자들이 나의 하루하루를 스쳐지나갔다. 충만한 지식과 노련한 술기에 자만하면서 환자에게 뻣뻣하던 치기어린 시절을 지나 이제는 나를 찾아와 주는 환자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겸손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속의 환자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이제는 인생 중반을 한참 넘어 한 지역의 개업의사이면서 건장한 세 자녀를 둔 가장으로 평범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산전수전 다 겪는다. 정도 차이일 뿐 금 수저나 흙 수저나 마찬가지다. 각 개인마다 그 나이를 처음 살아보는 것이니 실수와 도전이 반복되는 긴장의 연속이 결국 평범한 삶이다. 적당한 긴장과 알맞은 여유가 나를 지탱 시켜준다. 반복되는 진료실 일상 속에서 간혹 엉뚱한 에피소드로 활력소를 경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의 엉뚱한 몸 개그 때문에 슬퍼하던 상주의 얼굴에 웃음을 주듯 말이다.


문 열고 들어오면서 초기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겉옷을 어렵게 벗은 할머니가 결국 앉으면서 하는 말이 옷 벗을 이유도 없는

무릎 통증을 호소하거나, 지난 많은 사고 경험들을 다 하소연하듯이 이야기 하고 나서 결국 본론은 목 삔 통증이나 발가락 염증이다. 그럴 때면 진료 기록지에 진지하게 기록해가는 내 손에서 힘이 빠진다.


넘어지고 나서 무릎 통증으로 오신 노인분께 진찰 후 말씀드린다.
‘괜찮을 것 같은데 찜찜하면 X-ray 확인해 볼까요?‘ 하면 잘 못 들으시고 시원하게 답하신다.
‘집에서 찜질은 많이 하고 왔어’
어느 노인 분은 신경 주사로 통증 치료하고 몇일 물리치료 열심히 해드려서 치료 효과를
보셨는데 진료실을 나서면서 말씀하신다.
‘몇 달 전 한방 치료 받은 효과가 이제 나타나나봐 ’
병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드리고 통증 치료 주사에 대한 필요성을 다 말씀 드리면
‘이 주사 맞아도 되는 건가? (몸에 해로운 것 아닌가?) ’


과거 혈기 왕성할 때는 기어히 목에 힘줄 세우면서 시시비비를 가릴텐데 요즘은 그냥 웃어 넘긴다. 삶속의 모든 것이 꼭 흑백으로 확실하게

구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이제는 그렇게 따질 기력이 없다는 것이 더 솔직하겠지.
개업의사로서는 너무나 자주 겪는 경험들이라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환자와 같이 웃어넘기고 바로 잊어버린다. 나보다 더 인생의 모든 과정을 겪은 귀한 연륜의 표현들이니까 말이다.하긴 따지고 보면 의사들의 천편일률적인 두리뭉실한 답변에 답답해하는 환자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불성실한 것이 아니라 의사들도 예상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장담을 못한는 것뿐이다.


그런데 간혹 젊은 사람들도 나를 웃긴다. 썬글라스 끼고 들어와서 쇄골을 튀어나오게 만들어달라는 아가씨나 호랑이도 잡을 튼튼한 허박지가

아프다고 예비군 쉬겠다는 청년, 방사선 촬영하기 전에 가임기 여성에게는 임신 가능성 여부를 물어보는데 어떤 참한 아가씨는 ‘미혼인데 임신은 걱정 없어요’ 라고 다소곳하게 말하고 나서 본인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는지 갑자기 쑥스러운 미소를 띈다. 이럴 때는 젊은이들이 참 귀엽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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