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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떠남

이제 떠난다. 내 정든 것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로 잠시간다. 항상 떠나기 전에 이것 저것 준비하는 과정이 즐겁다.
해외진료는 사실 호사스럽게 놀러는 떠나고 싶은데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경영과 내 환자들이나 가족의 눈치보는
소심한 성격에 일석 이조를 생각하면서 행하는 내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우리나라에는 분명히 무의촌이 없다. 과거 무의촌 진료 랍시고 다녀보면 다들 평소 병원 잘 다니던 동네 노인들이 공짜 약 타러 오는 수준이지 의료 행위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상황이 아니다. 대부분 다른 부수적인 것을 원하는 (정치인들의 들러리, 국가의 일시적인 지역 캠패인등 ) 경우가 많다. 간혹 수해 지역을 가도 대형 병원에서 약을 대량으로 뿌려 놓고 가기에 개인 의사는 해 줄것이 없다. 그것이 개인의 한계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열린의사회 소속으로 참가한다.

분명히 의사로서 아픈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많지 않은 내가 이렇게 돈 써가면서 오지로 가는 이유가 과연 뭘까 자주 생각한다. 애양 병원에서 시골 노인들의 뻔한 하소연을 지겨워했고 소아마비 환자 보호자들의 푸념도 징그러웠다. 수술 후 걷게 해 줘서 감사해해도 별로 반갑게 듣지 않았던 매정한 외과 의사가 바로 나다. 수술은 좀 했지만 참 인간미 떨어지는 덜익은 외과 의사였다. 오직 수술 자체에만 욕심이 넘쳐났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는 내가 그런 인간인줄 솔직히 잘 몰랐었다. 애양병원 동료인 김인권 원장님 곁에서는 더더욱 나의 수준이 초라해지면서 마음 편하게 내수준에 맞춰서 살아가고자 결심하고 서울에 개업했었다. 물론 종교적인 의사도 아니다.

그런데 병원 문을 일시적으로 닫고 손해를 감수하면서 이렇게 해외 오지에 무료 진료를 간다는 것이 누가 보기에도 참 선한의사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럼 난 뭔가? 항상 그것이 궁굼했다. 표리부동한 인간인가? 그러던 차에 우연히 어느 영화의 한 자막으로 나를 깨우치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 이기주의적 박애주의자’다. 이처럼 나를 잘 표현해줄 말이 없다.
그래도 박애주의적 이기주의자보다는 나은가?

내가 의사로서 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하면서 내게 불평하는 환자에게 내 능력의 한계로 연민의 정을 느껴야 일반적인 착한 의사이겠지만 난 그 순간 그 사람을 마음에서 접는다. 모자란 내 능력보다는 환자가 받은 치료에 대한 감사함이 없으면 해줄 가치가 없다고 보고 관계를 접는다. 하지만 좋은 느낌을 전해 받으면 내 모든 것을 다 해드린다. 해외 진료를 가면 비록 바닦에 앉아서 손으로 점심을 먹는 상황이지만 내가 하는 의료 행위 자체에 대한 감사의 뜻을 깊은 만족으로 전해받는다. 사실 내가 해주는 의료 행위 수준은 좋게 표현해서 현지 적응 수준이다. 한국의 의료를 기준으로 하면 정말 하찮은 것이지만 현지의 수준으로 보면 그래도 가치가 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의료를 빙자한 지역 사회 봉사 성격이 짙다. 그래서 젊은 청소년단체들과의 동행을 좋아한다. 의료의 공급자나 수혜자들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기쁨을 내가 동행하면서 함께 선물해 줄수 있고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향기를 마음껏 마실 수 었어서 좋다.
그나마 이런 모임을 받아드리던 저계발국들도 점점 줄고 있다. 그만큼 잘 살아간다는 것이니 좋은 현상이라 본다.

국내에서는 남아도는 약품, 학용품, 옷가지등을 모아 정성껏 일일이 나눠주기도 하고 한국의 노래, 춤등 여러 가지를 소개하면서 국위선양하는 학생들과 함께 하는 그 순간이 내게 좋은 것이다. 진정한 의료 봉사라면 수술을 해주고 그 의료 수준을 그곳 의사들에게 전수해 줘야 하겠지만 내 길은 그게 아닌 것 같다. 그 길은 그 길을 가게 되어있는 분들에게 기꺼이 양보하며 존경 표한다. 난 내길에 만족한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 중의 한가지다. 그런데 그 정성과 마음의 힘이 조금씩 요즘은 퇴색해간다. 가족과 떨어지기 싫고 좀 편하게 여행하고 싶고 병원 비우는 것도 부담이 되고 무엇보다 내가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듯 하다. 나이 들어가나보다. 그 마음이 더 퇴색하기 전에 의료 봉사를 갈 수 없는 저개발 국가가 더 없어지기 전에 더 많은 곳을 더 자주 가야겠다. 그 다음은 내 것이 아니다.
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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