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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명동 나들이

3대 명동 여행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의 명동 나들이

형규가 우리보다 3일 더 늦게 미국에서 귀국을 했다. 우리도 아직 시차 적응 못한 비몽사몽의 단계다. 그러니 형규는 오죽하겠나 싶은데
아버지께서 다음날 명동 구경을 가자고 하신다. 그래도 착한 형규는 할아버지와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니 중간에 내가 모르는 척 할 수 없어 동참하게 되었다. 일년 전에 내가 부모님 모시고 같이 갔던 명동의 유서 깊은 다방에 다시 가 보고 싶어 하셨다. 아마 손자와의 추억을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것이리라.

저녁을 명동에서 먹을 생각으로 6시안되어 떠났다. 시차 적응중인 형규는 침대에서 혼수 상태로 자다가 간신히 깨어나 나와 함께
약속된 전철역으로 갔다. 아버지는 이미 와 계셨다.
충무로에서 명동역으로 갈아타는데 손자의 부측을 받아 계단을 올라가시는 뒷모습이 안쓰럽다. 세월이 흐른 만큼 사람도 변화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보니 왠지 서러웠다.
아버지는 우리 삼형제에게 참 당당하고 든든한 분이셨다. 이런 변화도 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겠지. 나를 씨름으로 이기시던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내가 간단히 이기던 아들 형규의 완력에 이제는 맥을 못춘다. 어짜피 새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하는
법이니 시간에 순응 하면서 순간에 충실하며 후회없이 살아야겠다.


가무(gamoo) 커피 숖에서 커피와 같이 나오는 케잌을 3대가 서로 나누면서 맛나게 먹었다. 1년전에는 중국 대사관 공사로 창문이
가려있었는데 이제는 대사관이 환히 보인다. 대만을 밀어버리고 외교의 승리를 이끈 중국의 등장이 피부로 느껴진다. 정말 운장한 건물이다.
아버지의 과거 수십년전의 추억 대화를 하고 중국 대사관 앞의 단골집어셨던 중국집으로 갔다. 막상 그 골목에 들어서니 어렴풋이
내 기억에서도 살아가는 추억이 있었다.
‘그래 바로 여기였구나‘
분명히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 따라서 이곳에 온 기억이 났다. 사실 명동 제일은행 지점에 근무하시는 아버지를 둔 가정이었으니
참 잘사는 집안이었지 싶다. 어떤 친구는 농구공도 6학년때 서울로 전학와서 처음 봤다는데 말이다. 지금의 우리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각자 나름의 최선으로 잘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전라도 보성 촌에서 서울로 올라 최고 일류 서울대학을 졸업하시고 한 가정을 키우셨다. 덕분에 나는 선진국인 일본에서도 3년 반을 살아보고 귀국해서도 신흥 명문 여의도에서 삶을 이어갔다. 그렇게 성장한 우리 집안은 현재 나는 한국을 지키고 두 동생들은
선진국 미국의 양쪽 끝 LA와 뉴욕에서 가정을 잘 이끌고 있으니 나름 성공한 집안이라 믿는다. 아님 말고지만.
사실 지금까지 유명을 달리 안하고 온 가족이 건강하게 같이 달려왔다는 자체가 행복한 것이라 .


맛난 식사를 마치고 우리 가정을 잘 키워준 과거 제일은행 본점 건물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그 일제시대 건물의 높은 천장에 놀라던

나의 초등시절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명동거리는 인산인해로 항상 정신없다. 이제는 많이 쇠퇴했다하지만 그래도 명동은 명동이다.
가늘게 뿌리는 눈발을 뒤로하고 아버지는 손자의 부축을 받으시면서 다시 전철역으로 들어서신다.
다양한 추억을 더 만들게 내년에도 와야겠다. 걷기 싫어하시는 어머니도 모시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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