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1일 (금요일)
아침 목욕을 시켜드리고 침대 커버와 환자복을 다 갈아드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공기는 상쾌하다.
오늘따라 정신도 말짱하고 컨디션이 아주 좋다 하신다. 당뇨가 조절되어가서 그런가 싶다. 식사도 여전히 참 잘하신다.
군대 짬밥도 비행기 기내식도 다 깨끗이 먹는 내 식성은 아버지 닮았나보다.
오전 회진중에 무미 건조하게 통보되었다. 오늘부터 항암치료 시작된다고.
환자나 가족들이 간절하게 기다린 조직 검사 결과는 1주일 만에 그저 악성 암이라 했고 고대하던 항암치료의 시작은 이렇게 무심하게 시작되었다. 의사의 처방에 말기 암환자에 대한 감정이입이 되면 의료인이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겠지만 환자입장에서는 차갑게 느껴진다.
세상일이 다 내가 견뎌야 할 나 만의 것이라는 느낌을 또 받는 아침이다.
아버지는 오후 1시부터 시작되는 항암치료에 많은 기대를 하고 계신다. ‘몸 안에 있는 암세포에게 빨리 경고를 보내주고 싶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나 역시 그럴 것이니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그 효과가 미미하다는 객관적 사실을 결코 말씀 드릴 수 없다. 그저 옆에서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항상 기적이란것이 있으니 ( 특히 우리 집안에 ) 계속 희망은 우리가족내에 상존한다.
영원히 든든할 것 같던 아버지께서 자꾸 주눅이 들어가면서 어려지시는 것 같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으시니 감사할 뿐이다. 복도 운동하시는데 부축받는 것을 엄청 싫어하신다. 남 보기에 환자 같다고 거부하신다. 그 자존심은 젊은 아들 삼형제보다 더 강하신 것 같다. 하긴 그것 때문에 우리 가족이 이렇게 커졌다고 믿는다. 전라도 보성에서 출생하셔서 서울에 근거지를 두고 세 아들중 두명이나 미국 대도시(뉴욕, LA)에서 잘 살고 있으니 말이다.
주위에서 여러 환자 경험담을 이야기해준다. 지인이 허리 통증으로 고생했는데 진단없이 여러곳을 전전하다 뒤늦게 췌장암 진단받고 약8개월 몰핀으로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아버지는 아직 뼈 전이는 안되었으니 천만 다행이다.
제발 통증만 잘 견디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의사 아들로서 최대한 막아드릴 것이다.
항암치료는 병실에서 이루어졌다. 혈관 주사로 주1회 100분에 걸쳐서 맞는 젬시타빈과 매일 아침 7시에 먹는 타세바 알약이다. 타세바는
방사능이 코팅되어있어 손으로 잡지 말고 컵에 담아서 드셔야한단다.
오후에 주사를 맞으시고도 전혀 메스꺼운 느낌이 없이 편하다 하셨다. 저녁에는 ‘혹시 오진이 아닐까?’ 하면서 웃으셨다. 이런 정도의 항암치료면 정말 계속 해볼만 할 것 같다.
그래 이렇게 계속 나아가자.
3월 22일
다행히 항암치료 받으신 날 밤 잘 주무셨다. 혹시나 해서 내가 병실에서 같이 있어보니 코까지 시원하게 고시면서 잘 주무셨다. 중간 중간
화장실 가시면서도 소변양 잘 측정해서 기록도 잘 하셨다. 소변 줄기도 강해졌다고 만족해 하신다.
아침 회진 전에 기다리면서 과거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서울대 재학 시절 가정교사로 일했던 문장군님의 영향력이 우리 집안을 참 많이 보호해줬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보성 촌 구석에서 태어나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여섯 동생들 중에 4명을 서울로 올려보내 우리 3형제와 같이 키우셨으니 말이다. 하긴 남편보다는 아내가 고생하셨겠지. 하지만 그 당시에는 한 집안에 잘난 아들이 다 그렇게 하지 않았나 싶다. 서울대 졸업하셔서 변변한 직정이 없던 60년대 당시에 최고의 직장인 은행에 취직하셨으니 말이다. 나중에는 조부모님과 함께 다 서울로 상경해서 서울에 사셨다. 귀한 집에서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사시던 어머니가 시집와서 허리 관절염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재수 없으면 빨갱이로 매도되는 시절이었으니 빨치산 본거지인 전라도 보성, 회천 출신으로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돌아가신 문장군님은 내 가족에게까지 복을 내려준 좋은 분이다 싶다 . 경찰서에서 취조 받다가 자살해서 자녀들을 지키신 동네 어른, 아들이 월북해서 망해버린 동네 제일의 갑부 집안등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농협에 다니셨던 외할아버지는 평소 노비들에게 잘 대해줘서 6.25당시 완장차고 위세부리던 그들에게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어머니 말씀도 있으셨다.
아버지는 아침에도 시력이 많이 좋고 기운이 난다고 하신다. 다행이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것 같다. 남들은 항암제 맞고 고생한다는데 아버지는 어째 항암제 주사를 맞고 나서 더 상태가 좋아지시는 것 같다. 하여간 다행이다.
아침 회진때 퇴원해도 좋다는 담당 교수의 의견에도 아버지는 좀 더 입원하시길 원하셨다. 어짜피 1인실이니 아버지 원하시는대로 편하게
좀 더 있어보자. 현재 모든 것은 오케이다. 천만 다행이다. 암 세포들이 죽어나가길 기원해본다.
맞은편의 6인실은 항상 시끄럽다. 새벽에도 환자의 기침 소리가 우리방까지 울린다. 아버지를 편하게 해드릴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이 좋다.
물론 모든 치료비를 아버지가 직접 다 내시고 계시지만 말이다.
3월 23일 (일)
새벽부터 미열이 있으면서 잠을 설치셨다. 결국 식은땀이 나서 혈당을 채크하니 당수치가 61로 나왔다. 저혈당을 치료하기 위해 냉장고에
있던 두유를 드렸다. 그 동안 드시고 싶었던 시원한 두류를 기분 좋게 ‘치료를 위해’ 드셨다. 그것도 두 개나 드셨다. 그런데도 30분 후에 채크하니 100을 간신히 넘기는 수치다. 저혈당이 되었다고 갑자기 문제가 생기는것이 아니고 치료도 그냥 쥬스 드시면 된다는 것을 아시고 많이 안심하신 것 같다. 마셔도 기껏 조금만 올라가니 안심되시나보다. ‘저혈당도 간혹 맛난 것 드실 수 있으니 좋네요’ 라고 말씀드리니 그냥 웃고 넘기신다. 이렇게 하나하나 깨우쳐 가는 과정인가보다.
나는 아침과 점심을 간단히 먹기에 항상 늦은 오후가 되면 저혈당 느낌을 받는 것이 다반사라고 이런 증상은 별것 아니라 말씀드리니 그런데도 그렇게 뱃살이 안빠지냐 하셨다. 부자 지간에 덕담이 이렇게 오간다.
<새벽의 조용한 병원 복도와 일요일의 찬양 >
일요일 내내 미열이 있고 힘이 없으셔서 하루 종일 침대에서 누워 계셨다. 복도 운동도 못하시겠다 하셨다. 지금 항암제와 암이 싸우는
과정이니 그냥 몸이 시키는 대로 마음 편하게 계시라고 말씀드렸다. 한참 전쟁중인가보다. 이참에 완전 박살 내버렸으면 싶다. 일요일이라
병실 복도에서 성가대 찬양이 들린다. 과거 수진이 입원했을 때도 일요일마다 기독교인들이 성가를 불러주곤 했었지... 그때가 2003년이니
벌써 11년 전 일이다. 그때도 우리는 아팠지만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저녁에는 조금씩 기운이 회복 되시는 듯 얼굴 표정이 밝아지셨다. 눈빛도 돌아오셨다.
사람은 몸의 컨디션에 따라 확실히 뭔가 모를 氣가 표정으로 표출된다. 그래도 생각보다 항암제 치료과정의 부작용이 적은 듯 해서 다행이다. 아직도 식욕은 안돌아오셨지만 그래도 열심히 나오는 식사는 거의 다 드셨다. 시원한 귤 한조각도 이제는 부담 없이 기쁘게 드신다. 이렇게만 가면 오래 치료하실 수 있을 것 같다.
3월 24일
새벽에 배가 가스가 듯 많이 불편하다 하셨다. 내가 보기에도 많이 찬것 같아 소화제를 얻어서 드셨다. 신땀은 나는데 하종일 침대에 계시면서 식사는 다 하셨으니 소화에 지장이 있을 듯싶다. 결국 새벽에 당을 재보니 또 51의 저혈당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식은땀이 나거나 어지럽진
않았다. 시원한 두유를 하나 다 맛나게 드시고 홍삼드링크도 드신 후 깊이 주무셨다. 오늘은 6시 30분까지 나도 같이 늦잠 자버렸다.
결국 인슐린은 30으로 더 내려서 맞기로 하셨다. 오늘은 컨디션을 거의 회복하시길 기원하면서 나는 나의 일터로 출근길에 오른다.
퇴근후 찾아뵈니 컨디션이 더 좋아지셨다. 얼굴빛도 좋으시다. 체중도 64kg 까지 내려갔다가 이제는 68kg이다. 잘 빠지시고 또한 잘 찌시는 것 보니 내가 닮았나보다. 어머니가 김치를 씻어서 조금 주셨는데도 너무 짜서 먹지 못했다 하신다. 이젠 저염식에 적응이 되신 것 같다. 하긴 나도 점점 저염식에 적응되어간다. 병실에서 샤워를 시켜드렸다. 많이 시원해 하신다. 내가 형규를 이렇게 씻겼듯이 아버지도 나를 그렇게 해주셨다. ‘아빠는 이발사다~’ 하시면서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주셨다. 내가 지금 수진이를 그렇게 해주곤 한다. 모든 것은 다 내리 사랑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3월 25일
아침에 가니 6시 30분이 되어가는데도 세상 모르고 주무시고 계신다. 새벽 당뇨는 107로 이제는 30unit 용량으로 조절 되는 것 같다. 샤워 후 아주 편하게 깊이 주무셨다면서 새벽에 당뇨 채크 한 것도 기억에 없다 하신다. 식사도 엄청 잘하셨다. 다시 회복 되신 것 같다.
연세우유가 맛있다 해서 자판기에서 뽑아 왔다. 우유팩은 간호사 몰래 숨겨서 버렸다. (이 사람들 바빠서 신경도 안 쓰겠지만...)
아침 회진때 정교수님이 퇴원을 권유하셨지만 아버지 뜻대로 1주일만 더 있기로 했다. 항암제 한번 더 맞고 회복된 다음에 퇴원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번 주말에 우리 가족 중 유일한 의사인 나와 아내도 (가족의 병진단도 못한 별 볼일 없는 의사이긴 하지만) 고향 보성에
아버지 심부름가서 서울에 없으니 말이다. 오늘 뉴욕에서 막내 준식이가 온다. 동생들이 우연히도 회사일로 번갈아가면서 귀국하여 아버지의 건강한 순간을 같이 하니 참 다행이다. 보여지는 보고픔보다 보이지 않는 그리움이 훨씬 더 삼키기 힘들다하니 최대한 최선을 다 해보자
<이곳으로 옮기신지 10일째다. 점점 병실이 편해진다.>
2014년 3월 26일
아침에도 저혈당이 보여 인슐린 주사를 26단위로 낮추었다. 아침 회진때 정교수께서는 결국 낮에 혈당이 높다 해도 새벽의 저혈당을 피해야하니 어쩔 수 없다 하신다. 오늘은 아버지께서 좀 더 적극적으로 인슐린을 자가 주입해보셨는데 완전히 노인 되셨다. 그 기억력 좋고 활기차시던 아버지가 아니시다. 모든 행동이 느리고 의료기구 사용 방법 습득이 더디시다. 손 힘도 없으시니 주사기를 잡는 자세가 나오질 않는다. 세월이 야속하다.
그래도 아침식사에는 준식이가 같이 있어줘서 분위기도 좋았다. 우리는 어머니가 준비해주신 연잎 밥을 먹었다. 병실에서 고기 구워 먹자는 황당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화로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도 짜증내는 것을 한 템포 숨 쉬고 해야할 것 같다. 인생 바쁠 것 없다.
그냥 다 한쪽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넘겨 버리자. 생각할 것도 없다. 분별에서 벗어나 버리자. 최소한 부모님 대할 때 는 말이다.
동생 덕분에 출근을 시간 두고 넉넉히 할 수 있어서 병원에서 커피 한잔 여유롭게 마셨다.
내일까지 원기 회복 마치시고 모레 다시 항암치료다. 그럼 1~2일 고생하시다가 다시 조금씩 원기 회복 하실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삶이 연속되는 거다. 하늘에서 허락 될 때 까지.
그런데 아버지는 요즘 집안 재산 문제를 자꾸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이야기 하신다.
내가 그럴 필요 없다했는데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시다. 난 이해가 전혀 안가지만 그냥 가는 대로 놔 둬야겠다.
요즘은 내 머리에서 생각이란 것을 없애고 싶다.
2014년 3월 27일
준식이가 아버지 병간호를 도와주는 덕에 어제 저녁에 길 벗회 친구들과 번개모임을 갖었다. 내 상황을 걱정해주던 친구들이 갑작스런 번개에도 다 모여줬다. 간만에 취했다. 아무 생각없이 취하고 싶었다.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들이다.
오늘 새벽에 또 저혈당 증상이 있어서 인슐린은 22유닛으로 줄인다 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당뇨 전문가가 맞나 모르겠다. 34에서 22까지 내려 온다는것이 전문가의 처방법인가? 정형외과 의사인나도 그렇게는 할 수 있겠다. 그래도 환자의 보호자로서 그냥 묵묵히 처방대로 받아들였다. 내일이면 다시 2차 항암 치료를 시작한다.
막내 준식이가 와있어서 참 든든하다. 이래서 가족이 중요한것이다.
2014년 3월 28일
오늘을 2차 항암치료를 오전에 시작했다. 아버지는 맞는 것 같지도 않다시면서 끝나고 점심도 드셨다한다. 저녁 통화에는 당이 다시 425로
올라가 기운이 좀 빠지신 듯 하지만 췌장암환자니 항암치료 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드렸다. 이제 내일 모레 거치면서 미열과 나른함으로 시간을 보낸 후 월요일정도면 퇴원하실 것 같다. 나는 내일 아버지를 대신해서 보성 고향에 시제를 드리면서 문중일을 해야 한다. 아버지와 같이 가려했는데 할 수 없이 우리 부부가 막내 숙부님과 함께 내려간다. 언제나 든든한 나의 막내 숙부님.
2014년 3월 29일 ~30일
막내 숙부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전라남도 보성 함양박씨 시제에 다녀왔다. 광주까지 차고 마중 나와주신 외숙부님의 친절로 편하게 광주를 출발했다. 비가 조금씩 오는 보성 녹차밭의 운치가 참 예술이었다. 먼저 외가에 들려서 외조부모님 산소에 성묘하고 큰이모님과 둘째 외숙부님이 차려준 진수성찬을 맛나게 먹었다. 오후에는 보성으로 들어가 동네 어른들과 인사를 나누고 처음만난 분들과도 통성명했다. 이웃들과 인사하고 해룡아제 아들이 왔다고 사방으로 전달 된다. 장손으로 어깨와 마음이 무거워진다. 마음이 없는 고향이니 정이 붙지는 않지만 그나마 우리 삼형제 중에서는 내 추억이 제일 많은 곳이다. 일본에서 와서 처음 맞은 초등학교 3학년의 겨울 방학을 이곳에서 보냈었다. 지금은 많이 개량된 집이지만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일요일에는 성묘 가서 비석 교체작업 다 완료 하고 마무리 확인 후 서울로 올라왔다. 귀경하는 버스에서 파김치가 되어 깊은 잠에 빠졌다. 물론 카톡으로 모든 사진을 다 서울에서 궁굼해하시는 아버지께 보내드렸다. 저녁에 병원에 찾아 뵙고 간단히 말씀 드렸다. 여러 일 진행 사진은 이미 카톡으로 실황중계를 다 해서 알고 계셨다. 일단은 아버지께서 시골 다녀온 나와 큰 며느리를 무척 대견해 하시니 마음은 놓인다.
아버지는 병실 내에서도 계속 정리과정을 본인 의지대로 하나씩 실행하고 계신다. 전혀 흔들림이 없으시다. 대단하시다.
나도 그렇게 하나씩 해결해 가자. 그 이후의 일은 그때 생각하자. 지금은 지금만 생각하자.
============= to be continued =============
'감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상 일기 4 ( 4차 치료 -2번째 cycle- 시작) (0) | 2014.06.26 |
---|---|
병상 일기 3 ( 통원 치료 시작) (0) | 2014.06.26 |
병상 일기 1 ( 항암 치료 전 ) (0) | 2014.06.24 |
아버지의 병상 일기를 남기면서 (0) | 2014.06.24 |
대한민국 현대사 일부 발췌 (펌) (0) | 2014.06.04 |